4.
그는 무슨 일을 겪게 될 것인가? 다른 화자를 만들어내어 그의 과거부터 이야기하도록 할까? 나는 이 어리석은 글쟁이에 관하여 말하면서 철저하게 ‘이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려고 하고 있으나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대로 쓰고 있노라면 이내 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래선 안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결국 나처럼 색깔 없는 남자가 될 수 있었다. 소설가라는 가면을 쓰고자 한다면, 조금 특별한 능력을 부여해야 한다. 이 가면은 짐 캐리의 ‘마스크’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특별한 능력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소설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이런 가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 능력은 남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것이었다. 물론 독심술이나 판타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관찰력이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남들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타인을 관찰하여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소설가라면 조금 매력적인 인물이 되지 않을까? 그 소설가는 어쩌면 타인의 마음을 너무 잘 읽는 통에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다른 사람을 너무 잘 살피다가 정작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을 우리는 종종 보지 않는가? 세상에는 타인을 위로할 줄 알면서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자신의 괴로운 모습이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안 되는지, 자신을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감싼다. 『그 역시 자신이 밝지 않으면 타인을 위로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라도 자신의 우울함을 감춰야만 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러한 우울함을 스스로 해소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냥 흘러가도록 두는 것이다. 『슬픔에 대해 나 우울하다고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그저 내버려 보는 것이 우울함을 다스리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일상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충실히 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우울감도 벗어버릴 수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우울함을 감추는 것이 가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타인에게 보여주는 모습 중에는 양복을 입고 장례식에서 보는 것과 같이, 상황과 장소 혹은 관계에 맞는 형태의 옷이 있고 그 옷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약속과도 같은 것임을 이해한다. 장례식에서 격식에 맞는 옷을 입는 까닭이 단순히 타인의 눈총 때문이 아님을 안다. 『그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흘러가는 대로 산다는 것이 충실히 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마치 물이 흘러갈 때 그 흐름은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흐르지 않는가? 앞에 바위가 있다고 해서 그 강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그 흐름을 막으려면 그 이상의 크기의 무엇인가가 그 앞에 존재해야만 하고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고들 한다. 그로서는 남들처럼 살 흐름 대신에 다른 지난하고 고단한 삶을 택했으니, 그것으로 혁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굳이 이것을 혁명적이라고 밝히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다음 문장은 단순히 이렇게 쓰겠다.『흘러가는 대로 충실히 인생을 사는 그에게 마음의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글을 쓰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치유가 되기도 한다. 소중한 이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받으면 받는 이는 크게 감동을 받지만, 그에 못지않게 주는 이 역시 그 마음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큰 위안을 얻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실체화시켜 정리한다는 것이며 유령과도 같이 보이지도 않는 것을 실제로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많은 경우 실체가 없다. 공포가 두려운 까닭은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은 공포영화에서처럼 등장인물을 갑자기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실체화된 괴물들이다. 현실 세계의 공포가 예술에서는 실체화된 그러한 공포로 구현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사회의 두려움을 그렇게 민감하게 잡아내어 구현해낸다.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는 실체화된 존재를 만들어 그것을 우리 앞에서 적어도 이겨낼 수 있는 전 지구적으로 느끼는 대중의 두려움이나 공포의 규모보다도 비교적 작으며 압축적인 존재로 구현해낸다. 그리하여 나는 저 위 결심의 문장에 한 문장을 더 덧붙인다.
『그에게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보이지 않는 삶의 두려움과 우울과 같은 기분의 근원을 파악하는 행위이며 사자와 같이 보이는 존재들은 그저 그림자였을 뿐이고 그 실체는 한낮 개새끼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을 만드는 행위였다. 다만 뒤엣것은 그가 의도하지 않아도 따라오는 것이었다.』 나는 분신과도 같은 이 풋내기 소설가에게 소설가로서의 사명감 같은 것은 주고 싶지 않다. 그저 그만큼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글을 써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무리 미천하게라도 예술의 조건을 갖추기를 열망하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매 줄 정당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술 자체는 우주의 온갖 양상에 깃들어 있는, 하나이자 여러 형태인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실제 우주를 가장 공정하게 나타내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닌 시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조셉 콘래드는 『나르서스호의 검둥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마치 과학자가 실체가 가진 법칙을 발견해 과학의 언어로 입증하는 것처럼, 어떠한 현상이나 실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예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증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차가워 보여 ‘표현’이라고 바꾸겠다.)이 예술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라는 말인 듯한데, 한동안 나는 이 말에 지나치게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리하여 마치 예술은 본래부터 그래야만 한다는 것,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난잡한 똥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생각했고 이는 가뜩이나 재능이 없는 나에게 글 쓰는 것이 마치 신이 부여한 권능처럼 여기게 했던 것이다. 빌어먹을 콘래드! 그는 원망스러우면서도 따라야만 하는 신이었고 나는 그 태초의 말씀에 짓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 양일 따름이었다. 부디 이 고통은 나만 받을테니, 이 어리석은 글쟁이만큼은 그러한 괴로움이 없기를! 마치 부모가 자신의 고생을 아이가 일찍부터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이 이야기의 소설가가 결코 내 고뇌를 알지 못하고 그저 희열감과 치유만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어쩔 수 없이 고뇌속에서 살아야하는 자신의 숙명을 바꿀 수 없는 걸 알게 되었다면, 개같이 멋있는 글을 써서 자신이 사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를 동시에 바랐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