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전쟁 - 아자가트』中 일부 각색
19세기 후반부터 식민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 가령 아프리카에서 얻는 경제적 이익과 여타 이익이 변변찮다는 점을 당시에도 인식하고 있었다면, 무엇이 식민지 '쟁탈전'을 야기했을까요?
영국은 유럽과 인도를 잇는 해로를 안전하기 지키기 위해 이미 남아프리카를 통제하고 있었어요. 즉 영국이 이집트를 개입한 까닭은 수에즈 운하 때문이었던 거죠. 짧은 해로의 안전에 대한 우려때문에요. 당시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며 인도를 위협한 것과 19세기 동안 영국의 대외적, 전략적 정책을 좌우한 지중해 동부에서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 속령들의 쓰임새는 군사력을 이용해 영국의 무역을 위협할지 모르는 다른 열강에 맞서 그 체제를 지키는 것이었죠. 그 자체로부터 이득을 얻을 수 있기보다 그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이 와중에 오랫동안 이집트에 경제적-정치적으로 관여했던 프랑스는 영국의 이집트 정권 탈취를 자국의 경제와 위신을 강타한 사건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시점부터 아프리카 쟁탈전이 시작된 것으로 말할 수 있는데, 프랑스가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식민지를 넓힌 것의 동기는 경제적인 것보다도 국가의 위신과 관련이 있었죠. 프랑스와 영국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유리한 중추적 위치를 확보한 독일이 아프리카 식민지 획득에 열중하자, 다른 나라에 앞서 토지를 차지하려는 과정이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어요.
쟁탈전은 영국이 방어를 위해 팽창하면서 다른 국가들의 '안보 딜레마'를 촉발하고, 이후로 더욱 팽창하면서 관련된 모든 국가에서 민족주의 추세를 강화하고 독점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기 시작한 사태였습니다. 요컨대 영국은 자유무역을 지키기 위해 공식 제국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거죠.
중국은 아프리카와 비교 불가할 정도로 훨씬 중요한 경제적 목표물이이었지만, 1890년대 말 중국에서 발달한 열강 간의 역학은 그리 다르지 않았어요. 열강은 모두 통일되고 개방된 중국 시장을 선호하면서도, 저마다 중국의 주권을 더욱 잠식함으로써 분할 과정을 촉발했어요. 이 분할을 거의 피할 수 없는 결론으로 간주했지만, 일본이 만주에서 러시아를 물리침으로써 러시아의 전진 위협을 제거하고 나자 그 결론을 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열강은 중국에 개방과 선취권을 요구하며 상충하는 압력 - 토착 중앙권위의 쇠락에 의해 촉발되었고 또 쇠락을 촉발하던 압력 - 을 가함으로써, 중국을 모두에게 개방된 단일한 무역지대에서 강대국들이 공식 통치하는 영역들로 바꾸겠다고 위협하고 있었죠.
경제 패권국 위치를 상실한 위험에 처한 영국이 이제 스스로 자유무역에서 후퇴하여 광대한 공식 제국을 보호주의 무역권으로 통합하는 정책의 이점에 관해 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이 지지했고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 얼마간 시행되었던 이 정책은 마침내 대공항기인 1932년에 채택되었죠.역으로 미국과 독일은 이제 제조업 수출을 가로막는 무역 장벽을 제거하는 데 점점 더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국내 시장을 가진 미국은 외국시장에 덜 의존하긴 했습니다만, 1930년대 전 세계 보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수출에 가장 큰 타격을 입었고 대공황에서 회복하는 데 지장을 받았습니다. 빌헬름 황제 시대 독일인들은 20세기가 도래할 무렵 '유럽합중국'의 자유무역지대나 유럽의 공동시장 만이 영국과 영 제국, 러시아의 광대한 공간에 비견할 만한 공간을 독일 산업에 제공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무역 지대는 평화적 합의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군사력과 정치적 지배를 통해 강요할 수도 있었죠. 더욱이 부상중인 세계 경제가 모두에게 개방되지 않고 열강에 의해 지리적으로 분할된다면, 독일 역시 식민 제국을 획득할 작정이었던 거에요. 독일은 식민지 획득 경제에 뒤늦게 뛰어들었으므로 독일의 제국 건설은 필연적으로 기존 질서를 변경할 터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독일의 패전으로 인해 그런 구상은 전투적-극단적으로 변해갔어요.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독일 제국, 즉 유럽 대륙을 활보하고 과거에 독일이 결여했던 장기전을 지속할 역량을 보유한 제국을 창설하는 과제는 히틀러에게 그의 인종주의적 계획 및 영원한 지구적 투쟁이라는 비전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자유주의 프로그램의 상호연관된 모든 측면들은 그에 상반되는 측면들로 대체되었습니다.
일본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어요. 원재료가 부족하고 무역에 크게 의존한 게 일본이었습니다. 그런데 30년대에서 보호주의 장벽을 세우자 큰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죠. 생존을 위해 제국을 반드시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기울어갔어요. 만주를 탈취하고 중국과 총력전을 벌였죠. 이후 중일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 유럽에서 본국의 중심이 독일에 점령당해 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이 갖는 유인, 결정적으로 원재료 - 무엇보다 석유- 에 대한 미국의 금수조치 같은 요인으로 인해 일본은 자급자족하는 제국,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거는 도박을 감행했어요. 분할된 산업적-상업적 세계 경제에서 한 제국의 경제적 - 전략적 논의는 일본이 애초에 계획했던 수준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바로 여기에 강대국들이 벌인 양차 대전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산업적-상업적 세계 경제가 개방되지 않고 분할된 것이라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압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죠. 이 관점에서 보면 세기 전환기의 아프리카에 경제적 가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적 식민 제국의 일부로서 발전할 장기적 전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를 들어 독일인들은 영어를 쓰는 사람과 그들 문화의 확산을 본보기로 여기고 부러워했습니다. 제국은 독일인들이 이주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 '빼앗길' 그들의 목적지가 될 터였죠. 일본도 조선과 만주에 세운 그들의 제국을 이와 비슷하게 바라보았어요. 이처럼 세계 경제의 자유무역 모델이 보호주의에서 밀려나고 그리하여 권력정치에 밀려남에 따라 국가적 고려사항 - 언제나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 - 이 더욱 중시되었습니다. 분할된 세계 경제에서 경제력이 국력을 키우는 한편 국력이 경제력을 보호하고 키웁니다.
공식 영 제국을 비판하는 자유무역론자들은 영국 자체의 발전에 시선을 고정하기보다, 영국이 떠났던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비자유주의 열강이 닫힌 제국을 힘의 원천으로 바꾸고 그리하여 한층 더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해 보아야 합니다. 열린 국제 경제에서는 국가의 크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권력 정치가 지배하는 국제 경제에서는 국가의 크기가 경제적 성공의 핵심 요인이 되었죠.
정리하면 그 당시 식민지가 이루어진 것은 식민지 자체가 주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아니었고 (대체로) 전략적 결정에 따른 것이었어요. 그리고 식민지가 분열된 상태에서 보호주의 무역이 전 세계 곳곳에서 대두되자 억지로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러한 상황에서 후발주자들은 현 국제질서를 개편하고 제국을 건설하여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해야했습니다.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는 거대한 제국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 전략적 전쟁물자를 자급자족하는 과제가 생겨난 거죠. 그러한 과정에 민족을 팽창하려는 '격세유전적' 충동과 분할된 세계 경제의 논리는 서로를 강화했어요. 민족주의와 식민주의가 함께 어우러졌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