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단토_일상적인 것의 변용
『변용』에서 단토가 전개하고 있는 예술철학은 "무엇이 어떤 것을 예술로 만드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단토는 예술이 지각 가능한 매체로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예술의 본질이 지각적 관찰에 의해 밝혀질 수 있는 것인지를, 다시 말해 예술의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지각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는 종류의 것인지를 분석한다. 21p.
무엇이 어떤 것을 예술로 만들까? 이를 위해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부터 먼저 정의해야 할 것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은 아니지만, 우리는 예술이 가진 어떠한 특성을 암흑의 핵심을 쓴 조셉 콘래드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예술이란 그 안에 진실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눈으로 보여지는 현상의 세계가 아니라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어떠한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예술 중에서도 미술에서의 예술도 아마 그러한 통찰, 깨달음의 길을 작가의 개성과 스타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되돌아가 '무엇이 어떤 것을 예술로 만드는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현 시대 곳곳에서 예술가라는 직업인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소재를 예술이라고 가져오는 것을 보면 사실 '어떤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는 듯하다. 그 개똥 같아 보이는 예술 작품에 작가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거나 심지어 그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무례할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권위자 혹은 평론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존재,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학문적으로 예술을 접하려고 하는 어느 이가 '대담하고 우아하게' 작품을 해석한다면 그것은 예술 작품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듯하니까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어떤 것'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일상적인 모든 것이 소재가 된다고 여겨도 될만한 시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무엇인데, 이 무엇은 곧 해석자가 어떤 툴을 가지고서 그 '어떤' 작품을 '예술이다!'라고 감탄사를 매기느냐일 것이다. 이 시대에는 그것은 아마도 철학 혹은 그에 근접한 영역의 학문적 툴로서 접근할 때, 예술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현 시대에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는 툴로서 철학이나 그의 하위 영역인 미학적인 관점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며 실용성 혹은 내부 장식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하던 고대의 작품들을 현 시대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면서 그 툴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예술의 본질이 지각적 관찰에 의해 밝혀질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에서 언급하는 바처럼, 예술의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지각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는 종류의 것인가? 우리의 지각을 통해 인식하는 그 변용된 현실, 그것이 예술 작품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그가 어떤 말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지각이 없다면 예술 아니, 예술 작품을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지각적 관찰에 따른 인식 과정이 아니라면 나는 이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그저 본질만을 생각한다면 지각적 관찰이 아닌 우리의 추상 속에서 해석하고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
예술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는 종차는 지향적(intentional)인 동시에 내포적(intensional)이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논리적 분석이나 지각적 검사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매우 집요할 정도로 추적한다. 그리고 결론부에서 그는 예술이 갖는 지향적 구조의 정점에 예술가의 스타일로서의 표현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22p.
개인주의의 발흥에 따라 각각의 개인들은 서로가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심지어 같은 것을 바라보는 이들조차도 마치 날씨의 변수처럼 여러 변수로 하여금 서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예측 불가능성을 높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서 오랜 시간 갈고 닦았으며 이로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자신의 관찰 혹은 인식 대상에 부여하여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이 글의 결론부에서 예술이 갖는 지향적 구조의 정점에 예술가의 스타일로서의 표현성을 말한 까닭도 바로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이는 마치 박효신을 생각해보면 같은 노래일지라도 그의 스타일의 변화에 따른 표현이 그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임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을까?
//
이 붉은 사각형들에는 각각 '키에르케고르의 기분'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민족' '니르바나' '붉은 사각형' 그리고 '무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예술작품의 제목들은 서로를 구별짓기 위한 명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단토의 기본적인 이해이다. 무엇인가에 제목이나 이름을 붙인다는 사실은 그 대상이 단순한 물리적 사물로 다루어지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물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사물과 이름의 배경을 이루는 제작의 역사는 각기 다르며, 대개의 경우 사물에 붙여진 이름은 사물들을 개체화하는 기능을 한다. 가상의 전시회에서 '키르케고르의 기분'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사각형의 붉은색은 불안의 느낌과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붉은색 자체가 그 덴마크 철학자의 심리적 불안감을 직접 표상하는 것은 아니다. 색으로서 붉은색은 단순한 붉은색일 뿐이며 그것 자체는 의미론적 기능을 할 자원을 갖고 있지 않다. '키르케고르의 기분'의 붉은색이 불안감을 표상할 수 있는 것은 그 작품을 만든 화가가 그 사각형의 붉은색으로 하여금 키르케고르의 심리적 상태를 지칭하도록 의미론적 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붉은색과 그것이 표상하는 불안의 느낌 사이의 인과관계는 물리적 속성들 간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붉은색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표상할 수 있게 하려는 예술가의 의도와 붉은색 간의 인과관계이다. 23p.
몬드리안의 작품은 구성 1,2,3.. 등과 같이 단지 같은 이름과 다른 숫자로만 그 제목이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까닭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쉽게 유추하기 어려워진다. 현대의 어떠한 미술 작품은 이와 마찬가지로 그 작품을 무엇인지 암시할만한 제목이 없으며,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해당 추상 미술 작품을 보고 대단히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는 가운데, 다행인 것은 어떤 이들은 그것을 보고 자신만의 제목과 해석을 과감히 곁들여 주변인을 즐겁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품은 감상자로 하여금 예술가의 의도를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 자체가 이름이 없기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클림트와 같은 이들이 그 형태가 아직 정해지지 않는 절벽 모양의 상에 이미지를 맞춰나가는 것과도 비슷하다. 다만 그것이 예술가가 자신만의 작품 자체를 완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보는 감상자가 자신만의 해석 자체의 완성하는 데 기여하도록 한다.
//
어떤 물리적 대상으로 하여금 특수한 의미론적 기능을 하도록 예술가가 의도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단순히' 물리적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물리적 대상을 마주하는 관람자들이 그것을 예술로 다룰 수 있으려면, 우선적으로 그것이 어떤 내용이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종류의 대상이라고 관람자가 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표지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기본적인 기능은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관람자는 이 대상이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감상되고 해석될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대상이라는 것을, 즉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관람자는 그 대상이 '예술'일 수도 있다는 의문조차 품지 않을 것이다. p. 24
'이것은 예술인가?'라고 누군가에게 물을 때,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어떤 물리적 표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이나 의미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즉 관람자가 이것이 예술임을 인식할 수 있는 어떤 표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직업으로서의) '예술가가 만들었다'는 표시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직접 이것을 만들지 않았더라도 왜 이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표식이어야 할 것이다. 작게는 미술관에 가져다 두었다 라는 것도 어떠한 표시가 될 것이다. 미술관은 우리의 인식 속에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곳임을 의미하고 그렇기에 평범한 작품이라도 이곳에 가져다 놓으면 우리는 그것이 '예술'일 수 있다는 의심과 함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의미를 예술작품을 탐미할 때 사용했던 인식의 여러 툴로 찾아보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
따라서 위의 사고실험은 단토의 예술철학에서 두 가지 주요한 기능을 한다. 첫째로, 예술가의 의도는 어떤 물리적 대상에게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것과 연관된다. 이런 종류의 의도는 단순한 지각적 식별 능력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 24p.
어떤 대상이 예술이 되는가? 이것은 예술가의 의도에 의해 적용되는 것이며 이것이 식별가능성 있고 없고에 따라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뒤샹의 샘을 보자. 이것은 그 자체 대상물이 예술작품이라고 식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순전히 예술가의 의도에 따라 비치되어 있을 때야만 작품으로 인정된다.
//
둘째로, 예술가의 의도는 예술작품의 구체적인 지각적 면모들에게 의미론적 기능을 부여하는 일과 연관된다. 24p.
예술가의 의도란 결국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대상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리고 관람자로 하여금 어떤 의미를 찾아내도록 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
전자의 의도(첫째…)는 특정 시점에 발생한 예술가의 특수한 심적 상태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반면, 후자(둘째…)의 의도는 작품 제작 당시에 예술가가 속해 있는 예술계에서 수용되는 예술 개념과 예술 이론, 규약 등에 의해 제한된다. 24p.
작품이 완성되면 그것은 예술계, 즉 평론가들이나 다른 예술가들에게서 수용될 수 있는 툴에 의해서 해석된다. 그것은 일종의 당시 시대의 패러다임이며, 그 패러다임의 틈새를 깨뜨리는 새로운 예술작품이 등장함으로써 패러다임은 전환된다.
//
2021-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