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2.

아서 단토_일상적인 것의 변용

by Chris

다음 글은 개인적이며 정제되지 않은 생각이 담긴 독서 노트일 뿐이니, 가급적 '좋아요'는 주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앞의 논의를 요약하면, 단토가 제시하려는 예술작품의 존재론은 바로 예술가가 작품에 대해 갖는 ‘의미론적 기능의 부여 가능성’을 축으로 한다. 즉 작품의 개체화는 작품의 물리적 상대역(physical counterpart)의 단순한 동일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작품에 부여하는 예술 이론적 차원의 지향성(intentionality)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술가가 그 작품에 특정한 지향적·의미론적 기능을 부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예술사적 조건의 문제로 귀착된다. 원칙적으로는 예술가는 작품에 어떤 의미론적 기능이든 부여할 수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그가 속한 예술계 내에서 취할 수 있는 이론들의 범위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이다. 25p.

작품의 물리적 상대역이라는 건 가령 피카소의 예술 작품(작품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아직까지는 그 통념상 물리적 특성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을 예로 든다면 피카소가 그린 비슷한 그림의 여러 작품들의 같은 특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즉 어떤 가치나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가의 해석에 따라 달려 있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예술사적 조건은 특정 시대의 예술이라고 칭하는 것들의 관념 안에서 특정 작품이 인정될 수 있느냐의 문제일터인데, 가령 피카소가 기독교의 관습이 절정에 이른 1000년 전 중세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큐비즘이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가? 피카소는 현대에서 그가 큐비즘에 관한 여러 물리적 상대물을 만들고 그것의 의미를 주창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대의 예술계의 패러다임에 의해서 제한될 수밖에 없고 예술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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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단토는 비평에서의 의도주의의 오류(the intentional fallacy), 즉 작품의 내용이나 의미가 전적으로 작가에 의해 결정되며 하나의 '올바른'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가 초래하는 오류를 예술 이론과 지향성의 결합에 의해 해소한다. 다시 말해 예술작품의 동일성은 예술가의 의도에 그 기원을 두지만, 작품의 면모들이 갖는 의미는 예술가가 속해 있는 예술계에서 인준되는 언어게임의 규약들에 의해서만 생성되고 전달되며 또한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토가 이해하고 있는 지향성은 개인적인 면과 규약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듯하다. 26p.

현대 사회에서 우리와 같은 대중조차 예술가의 의도에 따른 하나의 올바른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보기보다 여러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고 또한 작가의 무의식 차원에서까지 들여다보려고 애쓰며, 나아가 어떤 이념과 견해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해석을 존중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이 넘쳐나게 됨에 따라서 분명 문제도 있는데, 그것은 추상미술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와 같은 해석으로 마치 지적 사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보드 게임을 하면서 때때로 나는 그 특정 게임에서 그 시점에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규칙을 제안하곤 한다. 그렇게 하면 게임의 스타일이 달라지거나 전혀 다른 게임처럼 느껴지게도 하며, 기존의 우세했던 승자를 물리치고 새로운 스타일에 익숙한 새로운 승자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여기 말하는 언어 게임의 규약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 말에서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새롭게 만들고 그렇게 함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게임처럼 느끼게 만드는 현상들이 우리 사회에서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그 많은 규약 중에 주된 패러다임이 될 만한 규약들이 한동안 고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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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이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예술가에 의해 부여된 의미론적 기능을 갖는 표상적 개체라고 말할 때, 작품의 정체성은 물리적 인과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용적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단토는 보르헤스의 「시인 피에르 메나르」에 등장하는 한 편의 가상적인 작품에 대해 언급한다. 한 편에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있고, 그 옆에는 그것과 철자 하나 다르지 않지만 다른 제목이 붙여진 피에르 메나르의 소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세르반테스의 소설과 메나르의 소설이 철자 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면 무엇에 의해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가? 여기서 미술이나 조각처럼 물리적으로 시공간을 점유하는 조형예술과는 달리 시나 소설처럼 기보 체계(notation system)에 기반을 둔 작품들의 동일성은 과연 무엇에 의존하는가 하는 형이상적 문제가 제기된다. 27p.

둘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제목뿐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두 작품이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완성된 하나의 컴퓨터 프로그램 혹은 사진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복제하여 다른 이름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같은 것이다. 무한으로 복제하고 각각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까닭은 그 안의 내용적 인과관계가 서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A라는 게임의 게임의 저장된 파일처럼 a라는 유저가 완성된 프로그램의 스토리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 동영상으로 업로드를 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것은 오로지 a유저의 A 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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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먼을 충실히 따른다면, 이른바 정격 연주(authentic performance)만이 올바른 연주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정격 연주의 핵심은 작곡가가 의도한 악기에 의해, 그리고 그가 의도한 연주기법에 의해 연주하는 것에 있다.
굿먼은 음악작품의 동일성을 견지하기 위해 기보의 정확한 반복을 주장하지만 특별히 정격 연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는 상이한 연주라도 동일한 악보로 환원될 수 있으면 동일한 악보의 올바른 연주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27p.

이미 만들어진 게임이나 이미 완성된 악보는 완성된 것 안에서 그것을 연주(play)하는 사람에 따라 그 안에서 서로 자신의 개성을 뽐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보아도 그 작품을 play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야 하며, 대체로 게임은 시각적으로, 음악은 청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환원'이라는 말은 바로 그 연주(play)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작품임을 알아차리게 만든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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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실제로 우리의 예술적 실천은 이 정도로 엄격하지 않기 때문에, 굿먼이 제안하는 문학이나 음악의 동일성에 부합하지 않는 다양한 번역이나 연주 관행을 허용하며 이것은 예술가들이 동일성의 문제를 느슨하게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기보 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작품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는 동일성을 기준을 실제로 엄격하게 혹은 느슨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작품의 동일성의 근거가 예술가의 의도에 귀착하는가, 아니면 작가의 의도와 독립적인 것으로서 문화적 공간에서 작용하는 규약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28p.

예술 중 문학이나 음악에 한정하여 번역이나 음악의 변주에 대하여 그것이 예술가의 의도를 중시해야 하는가, 혹은 그와 상관없이 독립적이되 자신의 문화적 공간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규약을 따르는가에 관한 문제는 지금 사회에서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 까닭은 우리는 이 둘 다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번역의 경우 그것이 예술가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면서 완성되는가 하면 초월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 의도를 자신만의 해석으로 할 경우 논란의 여지는 있으니, 비교적 최근의 ‘이방인(이정서 역)’의 번역 사례가 그에 해당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음악의 경우 문학보다도 좀 더 느슨한 편인 듯한데, 그러한 까닭에 작곡가의 의도를 반영하여 연주를 하거나 자신만의 스타일로 바꿔 노래를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아예 의도와는 상관없이 재창조에 가깝게 이끌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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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도도한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단토는 ‘예술’을 해석되어야 할 종류의 대상으로 보고 해석 가능성을 예술의 본질적 면모로 본다. 맥락주의와 본질주의를 융합시키는 단토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동일성의 토대적 근거를 전혀 갖지 않는, ‘완전히’ 개방적인 개체가 아니며, 따라서 어떤 해석이든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해석 가능성의 근거는 예술작품의 내용이나 의미가 작가가 의존하는 예술 이론과 예술사적 지식에 의해 뒷받침되는 의도를 원인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한 지각적 관찰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8p.

동일한 주제의 두 예술작품이 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는 인상주의를 다른 하나는 사실주의를 택했다고 하자. 인상주의라는 예술의 기법으로 표현한 까닭은 그 시대의 맥락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물의 인상을 가장 강렬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주의는 사물의 인상보다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그 의도를 담고 있다. 결국 특정 예술 이론을 자신의 예술작품에 적용하는 까닭은 그러한 이론이 자신의 의도하는 바를 좀 더 명확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예술 작품은 예술사적 지식, 즉 예술가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 시대의 예술과 예술가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른 것이며, 그렇기에 그 시대를 넘어서면, 다른 시대에서는 또한 시대에 맞춰 해석될 여지가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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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례들을 통해 단토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문학이나 음악의 경우 작품의 동일성은 단지 기보의 일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보들에 의해 표상되는 내용의 문제라는 것이다. 오냐하면 똑같은 기보들의 쌍이라 할지라도 저자가 그 기보들에게 의도적으로 지정하는 의미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문장은 그것이 언표되는 시공간적 좌표, 화용론적 목적, 언표되는 방식 – 예를 들면 진리 주장이나 단순한 인용, 또는 화자의 주관적인 태도의 표현 등 – 에 따라 매우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단토에 의하면, 이 문제는 단지 동일한 문장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화용론적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문장이나 기보들로 구성된 예술작품들은 각 예술가의 특수한 의도를 상이한 원인으로 갖고 그에 따라 상이한 개체로 개별화되는 것으로 설명해야 하는 존재론적 문제라는 것이다. 29p.

가령,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미지의 배반’ 에 적힌 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말을 보자. 그것이 파이프 그림 아래에 존재하게 됨에 따라 옆집 아저씨가 파이프와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즉, 후자는 파이프와 비슷한 물건이지만, 파이프의 용도가 아님을 의미하거나 혹은 누군가 물었을 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면, 전자는 정말로 파이프라고 인식하는 그림 아래에 위치하여, 그 이미지를 보며 우리가 느끼는 인식을 일시에 당혹게 하다가, 저것이 그러면 무엇인지 생각게 한다. ‘저것은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그림일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늘 저러한 그림을 보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불러왔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게 한다. 뒤샹의 샘은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지의 배반에서 느끼는 당혹감을 느끼도록 하는데, 그 까닭은 저 소변기처럼 생긴 것에 ‘소변기’라는 이름 대신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것이 소변기가 아니라 ‘예술 작품’ 임을 깨닫도록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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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와 현상의 구별을 기준으로 삼아, 단토는 고대세계에서 철학이 발생한 곳은 고대 그리스와 인도 두 곳뿐이라고 보는데, 그가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다른 고대문명들과는 달리 그 두 문명에서만 실재와 현상의 구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경우, 단토는 철학과 예술이 동시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현실세계의 대상들이 진정한 실재인 이데아의 그림자로 설명된다. 그리고 플라톤의 예술론은 그의 형상론의 구조를 정확히 따르고 있다. 목수가 만든 침대는 침대-형상의 모사물이며, 화가가 그린 침대-그림은 실제 침대의 모사물이다. 물론 화가는 현실 세계의 침대를 충실하게 관찰해야 하고 침대와 다른 가구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화가가 갖추어야 할 것은 형상으로서의 ‘침대’에 관한 지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가가 수행하는 모방술은 사실상 단순한 기예의 문제가 아니라 ‘침대-형상’에 관한 올바른 지식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천재적인 음유시인 이온을 예술가로 부르지 않았다. 이온은 탁월한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그 퍼포먼스는 그의 천부적 재능의 결과였을 뿐, 자기가 하는 활동의 성격에 관한 성찰과 지식에 토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1p.

여기 고흐가 침대를 그린다고 하자. 그는 처음에는 침대를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고민과 생각을 거듭하여 자신만의 섬세한 붓의 터치로 자신만의 독특한 침대를 그림으로 완성할 것이다. 그 침대는 따뜻하나 뭔가 실체로서는 보기 힘든 고독감마저 느껴진다. 이 그림에는 침대에 대한 지식과 그 공간에 관한 성찰이 담겨 있으며 고흐가 붓을 들어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고자 노력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침대의 모사물이긴 하나 자체, 즉 실재가 아니며, 실제적인 기능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또한 실은, 실재가 없어도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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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적인 예술에서 포착할 수 있는 유사성은 논리적으로 독립적이다. 재현적인 예술에서 포착할 수 있는 유사성은 근본적으로 습관과 친숙함의 문제인 것이다. 32p.

우리가 침대를 익숙하게 보았기 때문에 어느 미술가가 그림으로 침대와 비슷한 형태를 그렸다 하면 그것이 침대인 것을 우리는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침대를 경험하지 못한 원시 부족이 그림을 보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을 침대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는 침대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누울 만한 기다란 직사각형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습관을 반추하여 거기에 누울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마저 만약 누군가 침대의 형태를 그물이나 혹은 누운 S 자 형태로 만들어 놓는다면,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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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철학이나 예술을 외연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비트겐슈타인이 후기 사상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든 정의 내리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선험적 분석에 의해 내려진 어떤 정의이든 주어진 모든 사례들을 총체적으로 포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의’라는 것은 귀납적 일반화의 결과로 얻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집합들의 사례들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례들 사이에서 유사성의 가닥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친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는 은유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유사성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미학자들에게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다. 33p.

나는 흔히 어떤 추상적인 것을 정의 내리기가 어려울 때, 이따금 그것을 말하면 생각나는 것들을 나열한 뒤 그것들이 가지는 어떠한 유사성이나 관계를 찾는다. 그 유사성의 가닥들은 때로는 마치 원을 이야기할 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정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전체적인 것이 가지는 주된 특징들을 말하고 그 추상적인 것 안에 포함되지만, 주된 특징에 포함시킬 수 없는 예외적인 것을 별도로 말한다. 어쩌면 이것이 과학이나 수학과 수많은 예술이나 법칙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여러 학문 등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이는 명백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 그렇기에 나열하고 주된 유사성(특징)을 찾는 정도가 전부인, 그리고 그것 또한 시대가 바뀌면 외연이 넓어지면서 예외적인 것이 중심에 좀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 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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