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3.
아서 단토_일상적인 것의 변용
다음 글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정제되지 않은 생각이 담긴 독서 노트일 뿐입니다. 가급적 '좋아요'는 주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와이츠는, 예술작품들의 집합이 개방적인 것은 단순히 귀납적 일반화의 결과가 아니라, 예술가들이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무엇인가 독창적인 것을 만들려 하기 때문에 예술작품들의 집합은 구조적으로 기껏해야 유사성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와이츠의 예술의 정의 불가능성 논제에 관해 단토는 그 그 논제의 디딤돌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한 편의 글을 다시 검토하면서 와이츠가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글은 윌리엄 케닉(William Kennick)의 「전통 미학은 오류에 기초하는가」라는 논문이다. 이 논문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창고에서 '모방' '표현' '유의미한 형식' 같은 예술의 전통적 정의에 부합하는 사례들을 발견하여 꺼내오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 사람은 그 정의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정의에 부합하는 사례들을 식별해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창고 안에 있는 물건들이 예술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재난적 상황에 대해 와이츠 같으면 그것은 모든 예술이 공통으로 갖는 본질적인 요소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즉 예술의 정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겠지만, 단토는 바로 이 상황이 예술의 정의 자체가 인지적 식별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예술의 정의는 근본적으로 내포적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4p.
예술 작품은 예술가가 독창성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기에 구조적인 유사성만을 가질 수 밖에 없다와 그러므로 예술은 정의 불가하다는 것을 말하는 와이츠의 정의는 곰브리치가 그의 미술사 책에서 주장하던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만 존재할 뿐이다.'와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러 역사 시대에서 존재하던 상이한 예술작품에 구조적인 유사성은 있을 지언정 어떤 특징을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정말 예술은 정의가 불가능한가? 그와 유사한 틀을 가진 것으로 예술 작품과 예술의 관계에 관하여 생각을 유추해보자.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책은 개별의 책들이 가진 모든 특징, 곧 활자화나 그림 혹은 그와 유사한 여러 상징과 기호(아무것도 쓰지 않고 출판되는 것조차 空이라는 일종의 상징으로 여겨)로 여러 물질(전자 잉크를 포함한)에 출판되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 안에는 들어갈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다만, 책을 쓰는 작가는 새로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기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독창성이 가미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오랜 세월에 걸친 작품으로서의 실재화된 책의 관념이었다. 정리하면, 우리는 어떤 물질에 활자나 그림 혹은 空을 포함한 상징 따위가 인쇄되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책이라 부른다. 내용은 상관이 없다. 아서 탄토의 정의를 따르자면,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책의 정의' 역시 인지적 식별의 문제라기보다 근본적으로 내포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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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학문으로서 미학이 성립되었을 때, 근대 미학이 초석으로 삼은 것은 인간의 특수한 내적 능력으로서의 취미(taste) 또는 판단 능력(faculty of judgment)이었다. 취미(taste) 능력은 외부세계로부터 경험적 정보를 직접 얻는 오감과는 달리, 오감이 외부에서 얻은 감각자료들을 내적으로 관조하는 내적 감각(inner sense)으로서 일종의 '마음의 눈' 같은 것이었다. 취미 능력은 흔히 미의식 또는 미적 감각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이 특수한 인지 능력에 의거해 예술을 정의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조지 디키는 그러한 미학이론들을 '미적 태도론'(theories of aesthetic attidtude)으로 일축하면서 미적 태도는 예술의 성격을 특징짓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상적인 지각과 구별되는 미적 지각(aesthetic perception)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으며, 설혹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 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관점들 중 하나일 뿐인 미적 관점을 취미라고 주장된 내적 능력에 귀속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4p.
취미 또는 기호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taste는 호·불호를 유발하는 감각적 능력일 것이다. 또한 우리의 오감으로 인식된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못함을 알아보고 예술이거나 예술이 아님을 단번에 판단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뒤샹의 '샘'이나 어떤 예술가가 시도했던 자신의 똥이 담긴 어떠한 통조림은 어떻게 이러한 미의식으로 예술이라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실로 18세기의 예술에 대한 정의는 20세기 이후 예술 작품의 외연이 다양해짐에 따라 그 정의 또한 바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의 변화는 예술과는 정반대편에 위치한 듯한 학문인 과학에서도 이루어진 바 있다. 뉴턴의 법칙으로 대표되는 근대 과학은 물질의 운동에 관하여 어떠한 법칙으로 해결될 수 있었으나, 양자 역학의 출현 이후 과학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받아들임에 따라 법칙에 따른 정확한 예측이 아닌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 즉 통계를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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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지각의 문제를 미적 관점의 문제로 해소할 경우, 그것이 곧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를 반드시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나 전문가들의 반응에서조차 흔히 볼 수 있듯이, 미적 지각은 대상에 대해 갖는 일종의 우호적인 태도로서 미적 반응으로 대체될 수 있다. 물론 미적 반응이 반드시 우호적인 평가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의 어떤 면모에 관해 부정적인 평가를 산출할 수도 있다. 미적 지각의 실재성 여부가 철학적으로 문제시되었다면, 미적 반응의 문제는 대상의 어떤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 미적으로 적합한가, 미적 적합성에 주어지는 제한조건들이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제한조건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만일 미적 반응이 단순히 주관적인 인지 능력을 행사한 결과일 뿐이라면, 미적 반응은 예술의 정의와 논리적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 미적 지각과 미적 반응을 근간으로 삼는 한, 미학은 예술철학과 논리적 연관성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35p.
비교적 최근에 예술계에서 이슈가 있다면 그 중에 하나는 연예인들의 예술계 진출일 것이다. 가령, 솔비와 그녀의 작품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그녀의 그림은 독특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미적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사람들은 그녀의 추상 미술 작품에 감탄을 하거나 심지어 전문가조차 작가의 이름이 연예인 솔비임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녀의 그림을 보고 예술적이라고 말할(반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적 반응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하게 될 경우, 우리는 그 솔비의 미술 작품의 어떤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 미적으로 적합한가(색? 텍스쳐? 작가의 명성?), 그 적합성에 주어지는 제한 조건은 무엇이 있는가, 제한 조건들이 있다면 무엇이 있는가(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 물감을 잘 사용하고 있는가? 그녀가 전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상황에 따라 제한 조건에 포함될 수도 있는 요소인가? 그리고 이런 것들은 적합성에 반드시 필요한 제한 조건인가 혹은 제한 조건일 수도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녀의 그림을 보면서 우리 중 누군가는 긍정적 반응을 또 누군가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다 위의 것들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주관적 인지 능력을 행사한 결과이며 이 책에서 말하는 예술의 정의와 논리적인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 즉, 그녀의 작품을 보며 미적 반응과 왜 그런 반응을 보이게 되었는지는 살펴볼 수 있더라도 그것이 그녀의 작품의 '예술'의 범주에 부합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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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저녁놀을 배경으로 이국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볼 때 우리가 나타낼 수 있는 미적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붉게 물든 하늘빛과 스카이라인을 주목하기 위해 우리가 사전에 예술작품들을 많이 감상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상황에서 미적 반응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문제의 미적 반응이 모종의 개념적 매개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역으로 말하면 그것은 만일 감상자가 그 광경이 예술작품의 일부라는 것을 알 때 그것에 반응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 그에 의하면, 예술작품에 대한 미적 반응은 우선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아는 의식,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것의 토대가 되는 특정한 예술 개념과 예술이론에 대한 지식에 의해 어떤 측면에 주목할 것인지, 그리고 그 측면들을 어떻게 동일시할 것인지 인도받으면서 형성된다. 36p.
뒤샹의 작품과 똑같이 생긴 작품이 흔한 화장실 변기로 있을 때, 우리는 변기의 기능적 측면에만 집중하며 그것에 담긴 예술성이나 의미를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미술관에 존재하며 예술가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때, 그것은 예술작품이 된다. 물론 이것은 대중의 합의 또한 있어야 하는데, 미술관이라는 곳의 대중적 합의는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관람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그 안에 비치된 것은 작품이라는 합의를 갖게 된다. 합의된 공간을 벗어난 작품은 예술로 인정을 받지 못할까? 우리 사회는 예술과 예술작품에 관한 한 시대의 일반적인 통념이 있으며, 그것은 공간에 대한 통념 뿐 아니라 예외적인 것들을 제외한 기존의 예술 작품에 관해 인식되는 통념과 유사성이 있는 것들은 예술 작품임을 우호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통념 속에 있는 것들은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도 알아볼 수 있으나, 미적으로 주목할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의 경우에는 예술작품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대단히 어려워지며, 이럴 때에는 그 대상이 전시되고 있는 공간의 통념이나 작가의 의도나 전달하고자하는 의미, 전문가 집단의 지적 판단 등에 기댄다. 가령, 우리에게 여러 다양한 형태의 의자가 있다고 하자. 그것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부분을 인지하고, 그 형태가 다양하더라도 의자라 판단한다. 그 판단은 과거의 유사한 것을 보고 체험한 경험이나 실상 보지 못했더라도 그 주요 특징의 유사성에 따라 추론하고 판단한다. 다만 뾰족한 원뿔 모형의 물체에 '의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의 상식으로 의자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의자로서의 기능이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의심하게 될 것이며, 실로 왜 그 대상에 의자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만든 사람의 의도나 혹은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포함한)누군가의 합리적 해석을 듣고 이해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우리의 통념 속에서 전혀 예술 작품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도 그것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될 때,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자세를 가지고 예술로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거나 누군가의 합리적 해석 또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스스로 노력 또는 들어보려고 할 것이다. 혹은 그것마저 귀찮으면, 의심하기도 전에 자신의 문화에서 언급되는 고정관념(혹은 예술계의 규약)을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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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각 예술작품이 요구하는 적절한 종류의 미적 반응이 있다. 원근법에 따라 그려진 풍경화를 보는 방식과 원근법과 일치하지 않는 동양의 산수화를 보는 방식이 다른 것은 지각능력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문제의 그림이 어떤 종류의 대상인가를 아는 개념적 틀의 차이 때문이다. 36p.
전혀 다른 문제를 같은 방식의 개념적 틀로 풀려고 하면 풀리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가치를 절하하게 한다. 예술 뿐 아니라, 무엇이든 이것이 어떤 종류의 대상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메슬로우의 심리학 책에 언급되는 “어린아이에게 망치를 주면 두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다닐 것이다” 라는 에이브러햄 캐플런(미국 철학자, 1964년)의 말은 한가지 개념적 틀만 가지고 있는 이가 경계해야 할 말이며, 어떤 종류의 대상인지 개념적으로 구분할 지식과 경험의 필요성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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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토는 미적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이나 면모가 어떤 것인지는 미리 알 수 없으며, 미적 반응의 부정적인 면이란 오직 대상이 예술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더 이상 주목하지 않는 경우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미적 반응의 적극적인 면이나 부정적인 면을 확정짓기 위해서는 대상이 어떤 종류의 대상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37p.
예술 작품으로 전시장에서 전시되지 않는 어떠한 산업 디자인에 우리가 예술작품 만큼의 미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만약 그렇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단토의 말에 적용해보면, 우리가 그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나'와 다른 누군가의 관계 맺기에 따른 반응이 예술이라는 범주에도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모르는 이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인지 면모가 어떤지 미리 알 수 없다. 그저 외모나 냄새 등의 오감으로 인식될 때 고찰하지 않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또는 그녀가 친구(한국적 의미의 친구가 아닌 진짜 벗이나 friend로서)의 범주 안에 들어오게 될 때, 자신의 반응의 적극적인 면이나 부정적인 면을 확정짓는다.
// 2021-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