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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l 24. 2022

Shall We Dance?

1막 1장.

“늦어서 죄송합니다. 자전거를 댈 곳을 찾다가 조금 늦었어요.”

첫날부터 늦었다는 생각에 궁색한 변명을 나도 모르게 늘어놓는다. 

“괜찮아요. 지금 앞에 가볍게 바운스 동작을 연습하고 있거든요. 가방은 여기에 두시고 신발은 밖에 있는 신발장에 두시면 됩니다.”

눈앞에는 두 강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미리 와 계신 분들이 재즈 음악에 리듬을 타고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조금은 어두운 갈색 조명과 갈색의 바닥, 그리고 흘러나오는 30~40년대 재즈를 닮은 경쾌한 음악이 어색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한가득 빈 곳을 채우고 있었다. 세상은 철문을 사이에 두고 어둡지만 경쾌한 공간과 밝지만 불쾌한 밖의 공간으로 완벽하게 구분했다. 

‘이 문 앞까지 다다르는 게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구나.’ 

함께 운동하는 형님께 스윙 댄스 지터벅 새내기 모집 글을 전해 받고서 할까 말까 고민한 그 며칠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때는 할까 말까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하고 보는 스타일이었는데,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보다 변함없는 하루의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더 좋아졌다. 새로운 것을 하지 않는다고 삶을 충실히 보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젊을 때의 사랑이 열정의 다른 이름이었다면, 시간이 흐른 뒤의 사랑이 열정에서 친밀감으로 차츰 그 색깔이 변해가듯, 그렇게 젊을 때의 삶은 열정으로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친밀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의 내 삶은 새로운 일들에 대한 열정을 쏟기보다 익숙한 일들에 농도를 더 깊이 더해가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따금 그 한 여름날 같은 젊은 날의 열정이, 새로운 일들에 대해 아무런 걱정도, 핑계도 없이 시작해보려는 태도가 그리울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밝은 세상에 신발을 올려두고 문 안쪽 어두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나의 태도는 시간을 거슬러 어린 시절에 존재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밝은 세상에서 올라올 때부터, 속삭이듯 두근대던 심장은 그 문을 들어섬과 동시에 뱉은 호흡 한 번으로 끊임없이 들리는 재즈 음악의 일정한 박자와 제법 어울리게 되었다. 

문을 지나쳐 연습실로 올라서자 도우미분께서 닉네임이 적힌 이름표를 주었다. 

‘Chris’ 

가입 신청서에 모임에서는 닉네임으로 부른다고 해서 예전부터 쓰던 닉네임을 적을까 하다가, 누군가 그 이름을 부르면 낯간지러움에 고개를 못 들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Chris라는 이름도 참 오래 썼다 싶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영어 이름을 만들어보라는 말에 나름의 의미를 담아 만들었던 생각이 났다. 부르기 쉬울뿐더러, 본명처럼 C와 H가 들어가기도 했고 추앙하는 인물의 이름과도 비슷했다. 어느 시절에는 이 이름을 더 익숙하게 느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어느 한 시기의 시간과 공간을 채우는 추억이 되고야 말았다. 

'스윙 재즈도 외국 거니 외국 이름도 나쁘지 않겠지?' 

이름표를 받아 보니, 문득 나만 영어로 적은 게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명찰을 소심하게 오른쪽 골반에 차고, 늦어서 미안한 기색이 묻어 있는 어색한 발걸음으로 앞쪽으로 이동했다. 적당히 뒤쪽에서 자리를 잡고 다른 사람이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무릎을 적당히 굽혔다가 펴는 동작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You must come back home.’

노랫말과 함께 바운스를 하는 동작을 떠올리니 그 동작이 점점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람도 동작도 친근해지려면 일단 유사점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유사점이라는 연결고리를 찾게 되면 친숙해지기 위한 과정으로 반복 숙달이 필요했다. 그 숙달의 과정에서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하는 일은 다음이었다. 이는 거의 모든 학습에서 필요한 과정인데, 그 흐름을 안정적으로 이끌려면 기본을 탄탄히 익히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기초가 가장 많이 쓰이고 중요하다. 기초에서 쓰이는 '초'라는 낱말이 처음을 나타내는 '초初'가 아니라 건물을 세우는 단단한 초석의 '초礎'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마치 둔기로 머리를 맞은 느낌을 한참 동안 받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기본, 기초에 대한 내 태도 자체도 달라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재즈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는 이 기초 동작은 음악의 흐름에 몸을 싣는 게 중요한 듯 보였다. 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딱 적당한 바운스, 상대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며, 나 역시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움. 이는 마치 지금 내가 하는 운동에서도 추구하고 있는 방향과도 일치했다. 바로 flow(흐름이라는 말로는 뭔가 어색하다)인데, 모든 몰입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문득, 이 춤이 내가 하는 운동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 그다음은…."

어느 정도 상대를 따라 하며 목각인형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몸의 리듬을 타고나니 앞에서 남녀 두 분이 다음 동작을 가르쳐주려는 듯했다. 모집 포스터에서 본 강사분들이어서 그런지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 다들 잘하시는 듯하니, 기본 스텝을 해볼게요. 기본 스텝은 락스텝과 스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락스텝은 뒤로 한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동작입니다. 리더(남자)는 왼발이 뒤로, 팔뤄(여자)는 오른발을 뒤로 빼시고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자 한번 해볼게요."

좀 전에 따라한 바운스를 그대로 유지하고 발을 뒤로 뺐다가 돌아오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스텝 동작입니다. 스텝은…."

락스텝 이후에 바운스를 하며 옆으로 한 스텝, 그다음 반대쪽 옆으로 한 스텝을 밟는 동작이었다. 리더는 락스텝 이후 뒤로 이동한 다리를 왼쪽으로 이동한 뒤에 그 다리에 무게 중심을 싣고 바운스를 하는 것 같았다. 발을 뒤로 옮기는 '락스텝'은 그 리듬감이 2박의 리듬에 '락'이 1박, '스텝'이 1박이라면, 사이드로 움직이는 이 '스텝'은 '스테 엡'이 동작의 리듬인데 중심을 이동하는 '스테'가 1박, 바운스를 타는 '엡'이 1박처럼 보였다. 결합하면, "락-스텝, 스테~엡, 스테~엡" 이 한 동작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다이내믹한 동작을 말로 풀어서 쓴 것일 뿐이며, 모든 동작은 설명할 때는 입자적(말)이지만, 움직일 때는 파동적(흐름)이기 때문에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동작을 글로 표현하는 까닭은 자신의 언어로 동작을 서술하면 그 동작을 인지하거나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포함한 많은 것들을 기억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리듬을 타는 것 보다도 리더 강사님의 동작을 보면서 움직임을 따라 하려니 락스텝 이후 스텝으로 다리의 측면 전환과 중심이동이 쉽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동작 가운데, 저와 유사한 동작이 없나?' 

생각해보니 주짓수 훈련에서 사이드 스텝과 조금 유사한 면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대학 시절에 수업 때 잠깐 배운 자이브의 기본 동작과도 유사한 면이 있었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다른 점이 있는데, 사이드 스텝도, 자이브도, 락스텝 이후 스텝으로 들어갈 때 반대쪽 발끝을 바닥에 찍지만, 지터벅의 기본 스텝에서는 한쪽 다리로 중심을 이동할 뿐 반대쪽 다리로 찍지 않고 바운스를 탈 뿐이었다. 이 점을 인지하고 다시 리듬감을 살려 해보니 조금은 더 수월해졌다. 익숙해질 때까지 입으로는 계속 "락-스텝, 스테~엡, 스테~엡"이라고 소리를 내고 그에 맞춰 다리를 움직였다. 

"그다음은 파트너와 함께 해볼게요. 파트너의 손을 잡으실 땐 리더는 손을 갈고리처럼 두고…."

자이브나 차차차에서는 상대의 손을 아래에서 가볍게 받친다는 느낌이었다면 스윙에서는 팔뤄가 손을 얹기는 하되 아래가 아닌 악수와 같이 측면에서 팔뤄가 위에 얹은 손을 갈고리처럼 거는 느낌에 가까웠다. 아마도 밀고 당기는 동작이 비교적 많으므로 이러한 포지션이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 느낌은 도복 주짓수에서 상대의 소매에 손을 거는 느낌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이는 상대를 움직임과 거리, 그리고 공간을 힘을 주지 않으면서도 밀고 당기는 걸로 컨트롤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보였다.  

도우미분의 도움을 받아 상대의 손이 내 갈고리 모양의 손 위에 살포시 얹어진다. 처음에는 어색한 엄지를 내려 상대의 손등 위를 누르니, 엄지는 누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손에 대고 있는 거라고 말해준다. 손 자세의 어색함이 마치 레고 인형의 그것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몸동작도 레고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락-스텝, 스테~엡, 스테~엡" 

입으로는 반복해서 소리를 내고 있고 두 눈은 다리를 떠날 줄 모른다. 처음에 느꼈던 리듬감은 어디로 가고 상대를 맞잡은 어색함과 입의 반복과 다리에 고정된 눈으로 인해, 익혔던 모든 것이 초기화된다. 나는 시방 딱딱한 레고다. 상대의 손이 닿으니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자! 그다음 동작은……."

아웃사이드 무슨 동작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이미 레고가 된 상태의 두뇌로는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상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새로운 동작을 따라 해보기 바쁘다. 리더, 팔뤄를 맡은 두 강사분께서 손을 맞잡고 시범을 보인다. 그에 맞춰 새로운 파트너와 손을 잡는다.

"턴을 돌 때는 손을 가볍게 대고 있으면 돼요."

"아, 이렇게요?"

왼손을 바깥쪽으로 올리니 파트너가 안쪽으로 들어가 돈다. 나는 그에 따라 반대쪽으로 이동한다. 돌 때 손은 부드럽게 교차된다. 

"네. 잘하셨어요!"

칭찬에 한 번 더 해본다. 칭찬은 고래뿐 아니라 레고도 춤추게 한다. 갈고리 손을 가진 레고는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는 손을 얻었다. 

그다음 파트너를 만나서 좀 전에 배운 것을 다시 해본다. 

"처음 해보시는 거예요?"

아까보다는 리듬이 조금 여유가 생기니, 구슬같은 목소리를 따라 떨어지지 않던 다리에서 잠시 상대의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곤 조금 웃으면서 답한다.

"네. 처음입니다."

"오, 처음 아닌 것 같이 잘하시네요."

빈말인 것을 아는데도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다. 실수할 때마다 웃어주신다. 레고의 얼굴에도 미소가 생겼다. 

"파트너 체인지 해볼게요."

새로운 파트너,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럽게 해 본다. 

"스텝 할 때 반대쪽 다리는 바닥에 끄는 게 아니라 들고 리듬을 타는 거예요." 

"아! 그렇군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있었나 봐요."

미소를 되찾자 그 반작용으로 자이브 스텝을 하고 있었나 보다. 레고의 다리에 리듬이 생겼다. 

"다음은…."

강사분이 인사이드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동작은 첫 번째 동작보다 수월했다. 왼쪽 팔을 안쪽에서 올리면 상대가 그 문을 들어가면서 돈다. 그리고 나는 상대가 있던 자리로 자리를 옮긴다. 동작을 몇 번 하다 보니 익숙해진다. 문제는 첫 번째 동작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헬창이세요?"

"네?"

"손가락이 굳은살이 있어서요. 3대 몇 치세요?"

레고는 갑자기 근육을 얻었다-가 아니라 뜬금없는 질문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 큰 웃음 한 번에 조금은 더 편안해지고 좀 더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레고는 긴장이 이완된 근육을 얻었다. 좀 더 즐거운 마음으로 편안한 일상의 대화를 시도한다. 다시 새로운 것을 배우며 둥근 원을 따라 다음 파트너들을 만난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처음 나를 잡아줬던 분이 눈앞에 있다. 처음의 어색한 인사와는 달리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인사를 건넨다. 이어서 몇 가지 다른 동작이 강사님들의 입에서 나온다.

"다음 동작은 핸드 체인지입니다. ... 락 스텝을 하고 스테~엡할 때 손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꿔주세요. 일단, 이 동작부터 해보겠습니다."

"아까보다는 좋아졌죠?"

자신감을 조금 더 얻은 레고는 편안한 마음으로 먼저 말을 걸어본다. 핸드 체인지 이후 락스텝 이후 상대를 당겨 내 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을 해본다. 

"이때에는 계속 잡고 있으면 팔이 꼬여요. 밀고 당기면서 놔주어야 해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다시 연습해본다. 강사분이 옆으로 오셔서 한 번 더 지도를 해주신다. 

"잘하셨어요. 잘하시네요."

이미 머릿속에는 영상에서 본 전문가처럼 추고 있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신나는 재즈 음악에 이미 춤을 추고 있고 상대를 밀고 당겼다 날리기도 한다. 

"바닥을 보지 말고 눈을 마주쳐야 해요. 상대의 눈을 보는 게 어색하면 이마나 얼굴 뒤쪽을 보세요." 

다시 만난 도우미분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아! 나는 리듬을 듣지 않고 있었구나.'

문득 나 자신만의 스텝에 정신이 팔려 상대를 보려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문득 머리가 희끗희끗한 정장 차림의 노인이 학생들에게 ‘너희는 지금 전혀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유튜브 영상이 떠오른다. 그는 드럼에 의해 스윙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스윙을 해야 한다며 연주자들에게 조언을 건넨다. 스윙을 의존해서는 안된다며 만약 혼자 연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스스로 스윙을 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직접 피아노 앞에 가더니 아주 경쾌한 스윙 음악을 보여준다.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따라가거나 그들에 의존하는 게 아닌 스스로 박자를 이끌고 가는 느낌! 스윙은 그런 것이라며 느려지지 말고 쭉 잘 끌고 가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상대를 이끌고 내 리듬을 주도하려면 바닥을 보는 게 아니라 상대의 눈을 마주치며 교감을 하는 게 우선이 되어야 한다. 스윙 댄스도 스윙의 일부라면, 그것 역시 음악에 녹아들어가 자신을 이끌어 가는 것일 테다. 그러려면 바닥을 보며 스텝에 의존하며 따라가기보다 전적으로 자신을 신뢰하며 스텝을 이끌어가야 한다. 경쾌한 스윙의 flow를 만드는 건 교감이구나! 레고는 눈과 숨을 얻었다. 

눈을 얻으니 전체적인 상황이 보인다. 상대의 몸짓이 보이고 내 움직임에 따라 상대가 반응하는 게 보인다.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조금 더 느낀다. 

"이제 배운 것을 실제 음악에 맞춰서 전체적으로 해볼 거예요."

음악이 나온다. 머릿속에서는 배운 것들이 다시 하얗게 되고 여섯 가지 중에 마지막과 처음, 그리고 두 번째 했던 움직임만 어설프게 떠오른다. 입으로 하던 리듬보다 조금은 느린 듯한 리듬을 여섯 박자로 쪼개서 움직이려니 모든 것을 잃고 다시 레고가 된다. 스텝은 엉키고 다시 상대가 아닌 바닥을 보고 팔은 엉키고 몸짓은 다시 스윙에서 주짓수 동작이 된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레고는 연신 실수할 때마다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아녜요. 제가 실수했어요."

웃으면서 건네는 대답에 천천히 배운 것을 생각해본다. 반복-숙달의 과정이 아직 부족한 탓에 배운 것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생각이란 걸 하면 이미 리듬을 놓쳐버려 스텝이 꼬이거나 팔이 꼬인다. "조급하실 필요 없어요."

나의 나쁜 버릇을 이미 상대는 발견한 듯하다. 바로 조바심이 문제였다. 운동할 때도 늘 조심하는 게 바로 조바심이었다. 여유 있는 마음을 깨뜨리고 생각을 가로막아, 상황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음악과 함께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할 수만 있다면 슬램덩크에서 주인공이 했던 것처럼 정신 차리라고 머리를 바닥에 박고 싶었다. 대신 심호흡 한번 하고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 둘- 하나 둘 셋 넷!"

"락-스텝, 스테~엡, 스테~엡."

박자를 맞춰가며 일단 떠오르는 것을 중심으로 추되 여유를 가지며 기본 스텝을 밟는다. 음악이 두 무릎에 왔다 간다. 상대와 맞잡은 손에서 놀다 간다. 마주한 눈에 웃음으로 머문다. 손동작 하나로 상대에게 의미를 전한다. 

'이번에는 아웃사이드로 갈 거예요. 이번에는 인사이드로 문을 만들게요.' 

미묘한 타이밍으로 상대의 움직임이 부드러울 수도 조금은 거칠 수도 있음을 느낀다. '너희는 전혀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 영상에 나온 교수의 말이 귀를 맴돈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조금 더 음악에 몸을 맡겨 본다. 문득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재즈라는 게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교리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개똥 같은 생각을 한다. 나를 구속하는 것들을 깨뜨리고 본질적인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것, 문득 스윙 댄스의 동작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은 그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 난 이제 막 지터벅을 1시간 배웠다. 여자가 친근하게 인사하자마자 유치원을 생각했다는 인터넷의 밈처럼 내 의식 저편의 나는 라라랜드의 주인공들처럼 어둠 속에서 둘만의 멋진 춤을 추고 있었고 영상에 나온 스윙을 가르치는 노 교수처럼 진리를 터득한 양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너는 전혀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

괜찮아. 내일은 스윙을 할 거니까. 난 자유로워. 

(내일) 너는 오늘도 전혀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

괜찮아. 내일은 스윙을 할 거니까. 난 자유로워.

(모레) 지금도 마찬가지로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

괜찮아. 내일은 스윙을 할 거니까. 난 자유로워.

(글피) 너는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

괜찮아. 내일은 스윙을 할 거니까. 난 자유로워. 


난 자유로운가? 드넓은 바다 위를 훨훨 날아가는 갈매기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가? 진정으로 너는 자유로운가?

괜찮은가? 정말 괜찮은가? 이대로 괜찮은가?


하늘을 나는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흘러, 뱅글뱅글 돌아가는 춤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면, 그때는 조금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바라는 것도 많고, 두려워하는 것도 많으니, 필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자유롭게 되지 않을까? 모든 게 망해버려도 조르바처럼 춤을 춰버리면 그만이게 될 수 있을까? 모든 게 망해버렸어요. 깔깔깔. 대장! 그냥 우리 춤이나 춥시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빠른 템포의 음악이 들려온다. 내가 좋아하는 속도이다. 음악이 귀에 들리자, 마음이 편해지면서 잊고 있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동작이 떠오른다. 상대의 팔을 들면 팔뤄가 먼저 돌고 그다음 내가 돌고, 팔을 바깥쪽으로 올려 내가 돈다. 

한 동작 이후에 쉬지 않고 연속 동작도 해본다. 손을 바꿔 잡고 상대를 가볍게 당겨서 내 쪽으로 이끌고 다시 잡으면 바로 다른 동작을 해본다. 파트너에게 인사를 하고 다음 파트너의 손을 잡을 때, 집에 가서 동작을 찾아보고 연습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꽤 성실하고 참을성이 많은 편이다. 믿을 만한 것이라곤 그것뿐이다. 오늘 못하면 내일 조금 더 나아지면 된다. 어차피 오랫동안 느긋하게 즐길 취미로 생각하니 남들보다 천천히 가도 아무 상관이 없다.


"If you make a mistake, if you get all tangled up, you just tango on."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탱고를 추지 않겠냐고 묻는다. 실수를 할까 봐서 두렵다는 그녀에게 알파치노는 이런 말을 건넨다. "탱고는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는 달리 단순하죠. 탱고는 정말 멋진 거예요. 만일 실수를 하거나, 스텝이 엉키거나, 당신은 그저 탱고를 계속하면 돼요(You just tango on)."

배운 동작과 조금은 다른 동작을 한 탓에 잠시 당황한 내게 눈앞의 팔뤄는 멈추지 않으면 괜찮다고 웃는다. 그녀의 눈에서 아주 잠깐 '여인의 향기'를 본다.

'스윙은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는 달리 단순하죠. 스윙은 정말 멋진 거예요. 만일 실수를 하거나, 스텝이 엉키거나, 당신은 그저 스윙을 계속하면 돼요(You just swing on).'

마음이 편안해진다. 뭐, 인생만큼 복잡한 것도 아닌데, 아무렴 어떠랴. 

"자! 이제 소셜을 할 거예요. 앉아 계신 분께 가서 춤을 신청하는 것을 홀딩이라고 하는데, 많이 신청해주세요. 블라블라……."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자유롭게 춤을 신청하고 추는 시간 같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멋진 스윙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하나둘 무대로 나와 자유롭게 춤을 춘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꽤 많은 사람이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그들이 나와서 춤을 추니 어두운 조명의 농도가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옆에 앉아 계신 분께 물어보니 린디합이라고 했다. 지터벅을 배우고 나서 린디 맛보기, 즐기기, 중급 과정 등을 한다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나 보던 역동적인 몸짓과 동작들이 나올 때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풍성한 치마도 뱅글뱅글 돌아가며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마치 스스로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인다. 

'저기서 조금 더 자신감 있게 뛴다면!' 영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그다음 장면에서 뛰어오를 것을 기대하고 춤을 본다. 감독은 이따금 음악에 맞춰 신나게 움직이는 다리를 클로즈업하고 또 다른 순간에는 팔 동작에 초점을 맞춘다. 어떤 이의 춤은 동작은 어색한 듯하나, 한 마리 새처럼 느껴진다. 조명 아래 비치는 그림자에서조차 행복함이 묻어나는 듯하다. 

'너도 나가봐!' 

리듬에 맞춰 다리가 건들거린다. 그러나 나는 꽤 성실하고 참을성이 많은 편이다. 아니, 이건 참을성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 해야 옳을까? 쓸데없이 부끄러워진다. 매번 그렇다. 마지막까지 이성을 붙잡는 건 부끄러움이다. 그것을 버려야 할 때조차도 마음 깊은 곳의 부끄러움이 이성을 볼모로 붙잡는다. 어둠과 음악을 뚫고 누군가가 손을 내민다. 부끄러움을 없애주는 손이다. 그 누군지 모르는 손에 이끌려 무대에 오른다. 내민 작은 손에 다시 자신감을 얻어 다리를 떼고 몸을 움직여본다. 문득 스윙이든, 탱고든 간에 인생보다 쉬운 까닭이 어쩌면 바로 저 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 인생에 누군가 먼저 손 내밀어주었던 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인생의 스텝이 꼬였을 때, 괜찮다고 말해준 이가 있던가?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 지금 너한테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겠지, 물 한 모금 달라고…. <최명희 혼불 中>


십 년 이상을, 아니 이 십 년 가까이 좋아한 구절이었다. 그 구절을 본 이후로, 나 역시 누군가 먼 길을 오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 와서는, 내게 물 한 모금 달라고 말할 이를 알아보고 물 한잔에 깊은 인연을 담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털끝이나마 믿고 있는) 쓸모없는 바람이었을 뿐이지만, 결국 소극적으로 앉아만 있어서는 누구도 오지 않을 일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저 행복한 춤을 함께 추자고 해야 할 일이었다. 비록 한순간일지언정 영원처럼 느낄 그 춤을 함께 추자고 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결국 부끄러움, 그리고 볼모로 잡힌 이성이 결국 그건 오로지 한순간일 뿐이라며 모든 것을 막아내고 어두운 무대 위에서 모든 게 다 환히 보이는 철문 밖으로 밀어낸다. 햇살은 뜨거울 뿐이며, 오로지 나만을 싣고 갈 자전거 한 대밖에 없다. 한 명 분의 페달을 계속 돌려야만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하는 검은색 자전거뿐이다. 내리쬐는 햇살도 막지 못하고, 떨어지는 빗물도 가리지 못한다. 밝은 세상에서는 미안하게도, 내미는 손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에서 어설픈 춤을 신나게 춘다. 노래가 멈추자 마치 몇 초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듯,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앉자마자 또 누군가 부른다. '이번엔 좀 더 적극적으로 해봐야지.' 다짐한다. 상대와 눈을 마주하니, 주변 상황이 좀 더 보인다. 옆에는 격렬한 춤을 추는 커플이 있다. 노란색 치마가 뱅글뱅글 돌더니 화려한 꽃이 된다. 공간을 넓게 쓰다 보니 파트너와 부딪힐 것 같다. 일단 인사이드 턴으로 배치를 옮기고 사람이 덜 붐비는 옆쪽으로 이끈다. 리듬이 다행스럽게도 끊기지 않는다. 눈을 들고 보니 확실히 좀 더 여유가 생긴다. 마스크 위로 나오는 숨이 안경에 닿아 자꾸 성에가 낀다. 토요일 밤이다. 토요일 밤은 멋진 음악과 화려한 조명이 있어야 한다. 토요일 밤은 웃음과 낭만이 있어야 한다. 토요일 밤은 실로 모두가 뜨거워야 한다. 추운 겨울이라도 토요일 밤이라면, 안경에 성에가 낄 수밖에 없다. 토요일 밤은 이래야 한다.

소셜 모임이 끝나자, 선배 기수의 공연이 시작된다. 어색함 따위는 없다는 듯 모두가 친근해 보인다. Wham의 'Wake Me Up Before You Go-Go'가 흘러나온다. “뚜 두두 Jitterbug~ 뚜 두두 Jitterbug~” 귀에 익숙한 음악이다. 맨 왼쪽의 80년대 스타일의 청재킷과 청치마를 입은 남녀가 세상을 다 가진 듯 아주 신나 보인다. 영화 써니에서 나온 듯한 옷차림과 몸짓이 음악과 가장 잘 어울린다. 그 움직임에 덩달아 몸을 들썩거린다. 그들은 큰 실수 없이 멋지게 공연을 마무리한다. '잘한다'보다 중요한 것은 실수하지 않는 것이다. 

6주 과정이 끝나면 우리도 사람들 앞에서 졸업 공연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잘하고 싶은 욕망은 없다. 그저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 살면서 느낀 바 중 하나는, 성실하고 꾸준하게만 하면 누구나 어느 경지에 오르게 된다는 자명한 진리이다. 혹하지 않고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매진만 하면 된다. 배움이 조금 빠른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잘하고 싶은 욕망이 깊어지면 미혹에 빠지게 된다. 그저 습관처럼 하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탁월함에 이르게 하는 것은 습관이다. 특히 기본을 다지는 습관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졸업 공연이 끝나자, 라인이라는 공연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춤을 춘다. 군무를 라인이라 하는 것 같다. 라인까지 거의 마칠 때쯤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다. 첫 모임의 뒤풀이를 위해 몇몇 사람들이 밖으로 나간다. 뜨거워진 신발을 반납하고 가방을 메고 문밖을 나선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통로 밖은 다른 어두운 세상이었다. 그제야 다른 어둠 속에서 함께 어색한 춤을 추던 사람들의 이름을 묻고 인사를 건넨다. 밤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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