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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가지되 웃음을 잃지 말 것.

by Chris

춤은 기예여야만 하는가? 또, 기술로서의 춤과 음악의 리듬에 맞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서의 춤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전에는 매번 물어보던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기예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서의 춤 외에도, 이 소셜 댄스에서는 ‘교감’이라는 영역이 존재했다. 무엇으로 교감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기예는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면 된다. 자연스러운 표현은 막춤을 추더라도 음악에 따라 표현하면 된다. 그러나 교감은 어떻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교감은 일종의 대화였다. 춤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느낌을 최근에 받은 적이 있었던가? 나의 감정을 상대와 공유하려면 우선 상대를 바라보고, 미소를 띤 채 눈을 마주치고, 상대와 주거니 받거니를 해야 한다. 동작을 하면서 바운스와 리듬, 박자가 딱딱 맞아갈 때도 교감을 한다고 느낀다. 뭔가 말을 하지 않아도, 열정이 공유되며 동기화가 된 느낌이랄까? 이 춤을 몹시도 사랑했던 한 누나는 이 소셜 댄스를 두고 “3분 동안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라고 말한 적 있다. 교감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나는 지금 그걸 잘 해내고 있는가? 아니, 기예와 표현, 교감 이 세 가지를 구분하는 게 의미 있는 일일까? 실은 기예와 표현도 다 교감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둘이 춤을 출 때는 내 눈앞의 상대와의 교감을 위해 내가 배운 것들을 음악에 맞춰 표현해야 하고, 공연할 때는 결국 관객과의 교감을 위해 배운 기예들을 표현해야 하지 않은가?


‘내가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라, 교감을 위한 배움과 표현이라는 관점을 가지면 어떨까? 말하자면, 춤이란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주도권을 잡기 위한 행동과 반응이 아니다. 이 댄스는 이끎(리딩)과 이끌림(팔뤄잉) 사이에서의 액션과 리액션은 기예를 통해 세련되게 드러날 수 있는데, 이는 억지스러움이 아니라 음악의 배경색에 맞는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교감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까닭, 또 몸에 밸 정도로 연습을 해야 하는 당위성, 그것을 하는 궁극적 이유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했다. 또, ‘똑같은 배움이라도 그 가치관이 다를 수 있겠구나!’ 싶었다.


넬리님과 연습을 마친 후, 잠시 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가려니 자정이 넘은 상태였다. 교감에 대해 생각을 하니,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교회를 다녔는데, 매미가 우는 시기가 되면 여름 성경 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곤 했다. 외부나 교회로 가서 몇 밤을 자고 놀면서 교육을 받는 일종의 수련회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사람이 아닌 외부의 것들과 이야기를 하고 귀를 기울여 보라고 하셨다. 6학년 형들은 선생님의 요구에 마지못해 방을 나오며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말했고, 고학년이었던 나도 형들의 말에 덩달아 수긍하는 척했지만, 그래도 제법 순수했던 터라, 화단에 핀 봉선화나 담벼락을 기어 다니는 개미를 보고 조용히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사물놀이나 농악을 배우기도 했는데, 시작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의식적인 행동은 바로 눈앞의 악기와 대화하는 일이었다. 마치 무생물이 생물인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마치 든든한 친구처럼 느껴져 관객들 앞에서 공연해야 하는 두려움이 없어지곤 했다. 그런 다음에 음악이 시작되면, 나는 리딩을 해야 하는 꽹과리였던 만큼 다른 악기들과의 조화를 고려해야 했다. 타악기들의 시끄러운 잡음이 아니라, 신나는 음악이 되기 위해선 어느 하나의 목소리가 커서는 안 됐고, 신나더라도 먼저 앞서가면 안 되었다. 사물놀이나 농악은 마치 재즈와 같아서, 같은 장단이라고 하더라도 지역마다 다른 색깔을 지녔고, 주어진 박자 안에서는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나름의 애드리브를 해도 되었다.


나는 어찌 보면 조화가 필요한 악기이고 상대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저 봉선화와도 같은 존재일는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처럼 말하지 않는 눈앞의 존재와 적극적인 교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 무생물과도 대화를 시도하고 이해해보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과는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그런 교감을 위해서는 진정성을 가지고 친절해야 한다. 나는 특히 험악(?)하게 생겼으니, 유머와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거 알아요? 크리스님, 춤을 출 때 이렇게 눈을 치켜뜨면서 올려다본다는 거?”


넬리님은 연습 도중에 눈을 치켜뜨는 내 모습을 따라 하며 이야기했다.


“어,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제가 그래요?”


뭔가에 집중할 때, 이따금 고개를 조금 숙이고 눈을 치켜뜨거나 입을 앙다무는 버릇이 있었다. 아마 예전에 나오던 그 버릇이 다시 나온 듯했다.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춤에 여유가 없어서 그랬나 싶었다. 습관은 제2의 본능이라고 했던가? 불안하거나 여유가 없을 때, 또는 의식하지 않으면 이런 습관이 본능처럼 나오게 된다.


“이럴 수가! 이러니 교감이 안 되지!”


이렇게 말하곤 나를 흉내 내는 넬리님을 보며 깔깔 웃어댔다.


춤을 출 때도, 살아갈 때도 진정성을 가지되 웃음을 잃지 말 것. 상대와 거울의 나를 보고 웃을 수 있을 때, 나도 그리고 상대도 마음이 열리는 법이니까.


어느덧, 집으로 향하는 빨간 버스가 정류장에 다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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