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너 아직도 걔네 좋아하냐?"
명절에 만난 친척의 물음에, 혹은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의 말에 나는 으쓱하며 대답한다. "그럼. 우린 이제 거의 가족이지." 그 '걔네'가 바로 슈퍼주니어라는 걸 눈치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2005년 11월 6일, 12명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원의 남자 아이돌 그룹이 데뷔했다. 'Super Junior 05'. 프로젝트 그룹이라 멤버들이 졸업하며 바뀔 거라는 말에 어린 마음에도 '이 조합 그대로를 어떻게 매년 봐?' 하며 불안해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9년이다.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엘프'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이쯤 되면 '덕질'이라기보다 '인생' 그 자체가 아닐까. 이 글은 19년 차 엘프가 슈퍼주니어와 함께 울고 웃었던 순간들을 조곤조곤 대화하듯 풀어내는 긴 수다다.
# 2005-2008: "웬 애들이 이렇게 많아?" 설렘과 불안의 시작
"와, 쟤네는 이름도 다 못 외우겠다."
'Twins (Knock Out)' 무대를 처음 봤을 때, 내 주변 모든 사람의 반응이었다. 시크한 단체 군무 속에서도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는 12명을 보며 나는 직감했다. '아, 여기 내가 좋아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구나.' 아니, 한 명이 아니었다. 예능에서 몸을 사리지 않던 희철과 이특, 조용하지만 강력한 춤 선을 보여주던 은혁과 동해, 감미로운 목소리의 예성과 려욱… 한 명 한 명 알아갈수록 나는 12개의 우주를 동시에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SM 특유의 SMP(SM Music Performance)를 벗어던지고 청량함 가득했던 'Miracle' 활동이 끝나고, 정식 멤버가 된 규현이 합류해 'U'가 나왔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슈퍼주니어'라는 이름으로 1위 트로피를 안았다. 2006년 6월 25일, SBS 인기가요. 펄 사파이어 블루 풍선이 넘실대던 객석과 무대 위에서 벅차오르던 멤버들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멤버들의 연이은 사고 소식은 우리를 철렁하게 했다. 특히 2007년 4월의 큰 교통사고는… 정말 많이 울었다. 매일같이 멤버들의 쾌유를 빌며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 한 줄에 가슴을 졸였다. '다 괜찮을 거야, 우리 다시 웃으면서 보자'고 서로를 다독였던 그 시간들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을 거다.
# 2009-2011: '쏘리 쏘리', 전 세계를 파랗게 물들이다
"쏘리 쏘리 쏘리 쏘리 내가 내가 내가 먼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Sorry, Sorry'는 말 그대로 신드롬이었다.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리고, 아시아 전역을 넘어 유럽, 남미까지 슈퍼주니어의 이름을 알렸다. 두 손을 싹싹 비는 그 간단한 안무는 전 세계적인 '커버 댄스' 열풍을 일으켰다. 수학여행 장기자랑은 물론이고, 길거리에서도 '쏘리 쏘리'가 울려 퍼졌다.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애들이야!" 괜히 뿌듯해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미인아 (Bonamana)', 'Mr. Simple'까지, 내는 앨범마다 대박이 났다. 연말 시상식 대상은 당연히 우리 차지 같았다. '슈퍼쇼'라는 브랜드 콘서트는 아시아를 넘어 월드 투어로 확장됐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멤버들의 연이은 이탈과 활동 중단 소식은 우리에게 큰 아픔이었다. 13명의 완전체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럼에도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남은 멤버들을 보며 우리는 더 악착같이 응원했다. "괜찮아, 기다릴게." 그 말 한마디를 가슴에 품고, 우리는 또 한 번의 성장통을 함께 겪어냈다.
# 2012-2019: 군백기, "고무신 거꾸로 신을 일 없어!"
"오빠, 몸 건강히 다녀와요! 우리가 여기 있을게요."
2010년 강인을 시작으로 멤버들은 하나둘씩 국방의 의무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 아이돌 팬덤에게 '군백기'(군 복무로 인한 공백기)는 가장 큰 위기라고들 하지만, 우리 엘프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10명이 넘는 멤버 구성이 이때 빛을 발했다. 한 명이 들어가면 다른 멤버가 활동하고, 유닛(슈퍼주니어-D&E, K.R.Y.)으로 앨범을 내고, 각자 예능과 드라마, 뮤지컬에서 활약했다. 공백이 느껴질 틈이 없었다.
물론, 완전체 무대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멤버들의 훈련소 사진 한 장에 울고 웃고, 휴가 나왔다는 소식에 동네 잔치라도 난 듯 기뻐했다. 멤버들은 입대 전 팬들에게 "잠깐 바람피워도 좋다", "어차피 돌아올 곳은 여기"라며 쿨하게 농담을 던졌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담긴 믿음과 우리를 향한 애정을. 그래서 우리는 꿋꿋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2019년, 막내 규현의 소집해제를 끝으로 약 10년간의 길고 길었던 군백기는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이제 다시 함께 달리자'는 약속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2020-현재: "우리는 19년째 현재진행형"
"요즘 애들은 모르지? 우리 오빠들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어린 친구들에게 '아는 형님'의 김희철, '미우새'의 시원으로 더 익숙할지도 모를 내 스타.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무대를 지켜왔고, '최초'와 '최고'의 기록들을 써 내려왔는지. 데뷔 15주년을 맞아 정규 10집 'The Renaissance'를 발매하고, 이제는 데뷔 20주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최근 열린 '슈퍼쇼 10'에 다녀왔다. 데뷔곡 'Twins'부터 최근 노래까지,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는 멤버들을 보며 울컥했다. 평균 나이 마흔, 이제는 '아재 아이돌'이라며 스스로를 희화화하지만, 무대 위 그들의 눈빛과 땀방울은 19년 전 그대로였다. 객석을 가득 채운 펄 사파이어 블루 물결 속에서 함께 노래하고 웃으며 깨달았다.
슈퍼주니어와 엘프는 단순히 스타와 팬의 관계가 아니라고. 함께 10대를, 20대를, 그리고 30대를 통과하며 서로의 가장 빛나는 순간과 가장 아픈 순간을 묵묵히 지켜봐 준 '전우'이자 '가족'이라고.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콘서트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 대신, 귓가에 그들의 노랫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19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걸어온 우리. 앞으로 걷게 될 20년, 30년의 길도 분명 지금처럼 유쾌하고, 든든하고, 애틋할 것이다. 우리는, 슈퍼주니어와 엘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