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박제가 되어버린 국보

이병현 평론가의 <국보>

by 영화평론가 이병현

<국보>는 인물관계를 직접적인 대사나 설명보다 미세한 시선과 행동으로 그린다. 키쿠오와 하루에의 관계는 섹스 이후 결혼을 제안하는 키쿠오의 말에 하루에가 “후원자가 되겠다”고 얼버무리는 순간 이미 금이 간다. 집을 떠나는 키쿠오를 바라보지 않는 하루에의 태도는 이들이 이어질 수 없음을 조용히 암시한다. 훗날 하루에가 슌스케를 따라나서는 갑작스러운 결정도,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필연적으로 예정된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 동기는 질문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키쿠오가 아키코와 맺는 관계도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아키코는 옥상에서 “대체 어디를 보는 거냐”라는 의미가 불분명한 질문을 던지는데, 이는 키쿠오의 내면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는 언제나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 예술적 이상향 혹은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아키코가 이 사실을 여행 도중 깨닫는 것이 아니라, 교토 집 앞에서 키쿠오와 슌스케가 다투던 때부터 이미 표정으로 예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키코와 키쿠오가 겪는 여정은 이미 알고 있는 파국을 확인해가는 절차에 가깝다. 영화는 인물들이 돌발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이유보다, 그 결정이 이미 의미를 잃은 상황 자체를 관객에게 은근히 제시한다. 우리가 오프닝을 바라볼 때 문득 후경에 내리는 눈을 이미 가슴 시리게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이치로.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9001


씨네21에 '국보' 평론을 기고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즐겁게 본 영화지만 '딸'이 등장하는 장면부터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그 점을 중심으로 정리해 봤습니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 기고문이 될 듯하네요.

모두 좋은 연말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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