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짤막한 리뷰를 남겼습니다.
그나저나 제목 말인데요. 저는 약 10년 전부터 이렇게 번역을 하는 대신 음차만 한 제목은 영화계에서 완전히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정말 이런 음차 제목 중에서도 단연 최악이네요. 길고, 무슨 뜻인지 감도 안 잡히고…….
*이하 스포일러 있음*
1,
영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저는 이 영화를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그나마 캐릭터 빌딩이 제대로 되고 유의미한 갈등이 형성되는 지점은 모녀 관계 뿐인데, 1부인 '모든 것'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이 갈등이 손쉽게 해결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캐릭터는 거의 영화 전개를 위한 곁다리 수준에 불과하고, 딱히 깊은 갈등이나 서사도 형성되지 않죠. 한 마디로 가족 드라마로서도 그다지 '진짜'란 생각이 들지 않았고, SF로서도 그다지 '진짜'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갈등 해소 과정을 생각해봅시다. '조부 투바키'라는 캐릭터가 가진 허무주의는 상당히 엄청난 것입니다. 조부 투바키가 신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전지전능한 존재인 조부 투바키를 일깨우는 것이 가족의 사랑이라는 전개는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조부 투바키가 벌인 악행의 스케일이나 자연법칙조차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그 어마어마한 힘에 비해서, 결국 이 빌런의 약점이란 것이 어머니로 인한 상처와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이거든요.
무한한 평행세계가 있는 세상이잖아요? 그중에서는 심지어 인류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 분기점까지 있을 정도로, 정말 무서울 정도로 무한한 평행세계가 존재하는 세상인데요. 그런 모든 세계를 겪고도 결국 어머니의 사랑으로 치유받는다?
몇 개만 예를 들어 봅시다. 인류의 진화 분기점에서,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아이도 공동 양육하는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가정해보죠. 그 가상의 인류에는 날개가 달려있어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고, 정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겨다니는 히피 생활을 하는데, 가끔씩 다른 무리를 만날 때마다 서로 인적 자원을 교환하는 의식을 치루는 세상이라고 가정해보자고요. 이 경우, 조이는 에블린의 생물학적 딸이긴 하겠지만, 양육은 거의 받지 않은 상태로 자라났고, 5살 때 다른 무리에 합류해 에블린은 영영 보지 못하고 자랐을 겁니다. 이런 버전의 조이에게도 에블린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있을까요?
혹은 인류에게 진화과정에서 신경삭이 자라난 세상이라고 쳐봅시다. 이 신경삭-인류는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마치 곤충무리처럼 즉각적으로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여왕-인간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이 신경삭-인류 사회 속에서, 에블린과 조이는 서로가 서로를 구분되는 개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리에 연결되어 있는 '집단의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평행세계 속 조이는 에블린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에블린(+다른 모든 전인류)이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은 신경삭으로 이어져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다른 모든 전인류와 한꺼번에 공유하고 있는 신경삭-인류이니까요.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가정은 끝도 없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이론상 '에에올' 속 세계는 제가 어떤 황당한 헛소리를 하더라도 모든 것이 다 구현 가능하니까요. '에에올'에 없는 평행세계라 하더라도 자연법칙조차 비틀 수 있는 조부 투바키는 아예 제가 말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조차 가능하겠죠.
이런 존재가 세운 계획이 자신의 생물학적 어머니(중 하나의 버전)가 보인 '사랑' 때문에 틀어지게 된다는 전개는 순전한 클리셰일 뿐, 설득력 있는 전개는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조부 투바키는 에블린만이 자신의 허무주의를 유일하게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 믿고 기다렸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하죠. 에블린이 조부 투바키와 비슷한 존재가 되어서 설득이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언제든지 설득될 준비가 되어있었던 '인간적인' 존재에 불과했다는 증거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를 다 보고나서, '겨우 이러려고 이 난장판을 벌였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을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네요. '인간 하나의 내면 세계를 보여주려고 뭘 이렇게까지?' 싶은 그 마음. 두 모녀의 컴플렉스 극복 및 화해 이야기 하려고 무한한 평행세계의 다른 모든 존재를 들러리 세우는 건 다소 과하단 생각이 듭니다.
2.
평행세계를 소재로 다룬 SF소설은 널리고 널린 것이긴 한데, 당장 생각나는 것으로는 테드 창 소설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단편집 '숨'에 실린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는 단편인데요. 이 단편 역시 선택의 분기점마다 평행세계가 생긴다는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이 단편도 한 개인의 성장으로 귀결되는 뻔하다면 뻔한 전개를 보여주는데요. 그 와중에 평행세계라는 아이디어로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활용하는 것이 아주 탁월합니다. '다른 평행세계와 교신할 수 있는 장치'를 중심으로 가상의 사회적 구성물을 그려내는데 그게 아주 그럴 듯해서 읽는 재미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