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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영어 교사 Oct 19. 2020

매일매일이 똑같았던 나는 그림을 시작했다.

관찰하고 그리는 맛

요즘 글을 쓰는 재미에 푹 빠졌었다.
아침에 샤워를 하면서 지난밤 꿈을 생각한다. 출근길 지하철 역에서 항상 같은 시간에 만나는 이름 모를 할아버지를 궁금해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서는 내겐 정말 쓸 거리가 많다는 생각에 기쁨을 느꼈다. 하나하나 관찰과 감정들을 메모해갔다. 이 메모들이 시간이 지나면 숙성되고 발효되어서 나를 기쁘게 해 줄 한 단락의 글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즐거웠다.

퇴근 후 짬짬이 메모장을 들춰보며 책상에 앉아 머리만 싸매다 펜을 놓는 날이 늘어갔다. 당황스럽다.
소재는 넘쳐나고 시간은 넘쳐나는데, 도대체가 문장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래도 어떤 날은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마음에 억지로 키보드를 두드리지만,
어디 보여주기 민망한 낱말들이 흰 백지 위에서 겉돈다.
나는 아직 멀었나 보다. 책상 위에서 체념하고 침대에 누워 자책한다.

큰 맘먹고 책상에 앉은 주말 또 언제나처럼 한 문장도 써지지 않아서,
브런치 글들을 읽어 보다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
‘브런치에도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이 있구나’
대부분 단순한 선들로 이루어진 그림들과 짧은 글귀는 나를 웃기기도 했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좋은 글이 가져야 할 통찰과 공감들이 가득했다.
‘그래 이거지. 이건 글 쓰는 것보다 쉽겠네.’
와이프를 재촉해서 집안 어딘가에 굴러다니던 플러스 펜을 찾아 당당하게 말했다.
이제 나는 그림 에세이를 쓰겠다고.


호기롭게 연습장에 내 캐릭터를 하나 만들려 하는데 아무것도 그릴 수가 없었다.
동그라미 하나 그렸다가 맘에 안 들어서 지워버리고
팔다리는 도대체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그림 속 나는 가관이었다.
인물은 됐다 해서 배경이라도 그려보면 구도가 아예 없는 방이라 입주자들 생명에 지장이 있겠다 싶었다.
인생에 거저 오는 게 도대체가 하나 없어 답답하다.

그래도 글을 쓰며 유일하게 얻은 것 하나는 오기니까
그림을 한번 배워봐야지 생각해서 SICLE에 접속했다.
이런저런 그림 강좌들을 둘러보다 달다 작가님의 강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업을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습작을 시작했다.


주변 사물을 하나하나 그려보기.
눈은 종이가 아니라 사물에 있어야 된다고 한다. 종이는 한 번씩 확인용으로만 바라보면서
사물에 집중했다. 그림자도 바라보고 박음질된 실들도 보고 내려앉은 먼지와 손자국들도 관찰한다.
사물에 집중하며 이리저리 관찰하다 보니, 아 여태까지 내가 정말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구나 반성이 된다.
너도 누군가가 밤을 새워 디자인을 하고 모서리를 다듬었겠지.
몰라 봐서 정말 미안.

한 그림을 완성하고 또 다른 사물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려본다.
당연히 미숙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완성된 그림보다는 사물을 관찰하는 것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핸드크림을 보고, 마우스를 보고, 꽃을 보고 달을 바라보면서
잠깐 동안 내 머릿속을 사물로 완전히 채워갔다.
당연히 이렇게 생겼겠거니 생각했던 것들은 내 눈에 새롭게 들어왔고,
내가 보는 방향에 반응하는 그림자를 인식하며 새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집중했다.
무언가 내 감각으로 들어와서 내 손 끝, 펜 끝에서 나타나는 것을 인식했다.
눈으로 들어왔다 손 끝으로 나가는 것들의 감각은 새롭거나 잊고 있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매일 다니던 출퇴근 길 가게들은 저마다 화려하거나 소박한 간판들을 달고 있었고,
지하철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저마다 다른 하루가 배어 있었다.
달은 지난 주보다 더 야위었고, 나무들은 물이 들어 산의 모습을 바꿔갔다.
와이프는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귀걸이를 바꿔 꼈고, 애기 고양이는 배에 조그마한 점무늬가 생겨나고 있었다.


매일이 단조롭고 똑같았던 내게
그림은 매일매일 다른 모습들과 경험들을 선물했다.

“훌륭한 그림은 스킬이나 구도가 뛰어난 그림이 아니에요.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완성한 그림이 훌륭한 그림이라고 해요.”

아마 첫 시간에 작가님이 말했던 것 같다.
수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저 말을 되새겨본다.
어디 내놔서 좋은 평을 듣지 못하던,
남들이 뒤에서 흉을 보던 말던,
내가 끝까지 놓지 않고 완성한 그림과 글은 정말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루를 힘겹게 버티던 나 자신에게도 들려준다. 오늘 하루도 훌륭하게 저물어가고 있다고.
나는 매일을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고 있다.
이 날들은 나름대로 훌륭한 날들이 되어 기억 속으로 쌓여가겠지.
요즘은 그림 그리는 게 즐겁고, 하루하루가 너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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