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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영어 교사 Oct 06. 2020

01. 순이야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길고양이님께서 간택하셨습니다

“고양이는 선택하는 게 아냐. 우리가 간택받는 거야.”


재미 삼 아들 이야기한다.

SNS가 우리 일상으로 들어온 이후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존재는 고양이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고양이라는 생명체가 우리와 이토록 가까워진 건 아마도 한반도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이 시대적 흐름과 발맞춰, 우리 집에는 고양이가 네 마리 계신다.

2년 전 고양이 나라로 떠나간 뽀뽀를 포함하면 다섯 마리.

나와 인연을 맺게 된 다섯 마리의 고양이가

오늘도 온 집안에 털을 뿜어댄다. 좀 전에 마셨던 커피에도 털 한 가닥이 둥둥.

급하게 마시지 말라는 배려에 오늘도 감사.


우리 아파트에는 우리 부부가 애용해 마지않는 정자가 있다.

여름밤에 돗자리를 쫙 펴고 나는 책을, 와이프는 그림을 그린다.

정자에서 마시는 맥주는 무알콜인 것 마냥 쭉쭉 들어가는 매력이 있다.

3개월쯤 전이었나.

여름 낮 동안 햇빛을 받고 쭉쭉 자란 이름 모를 풀들이 푸더덕 푸더덕 거리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그리고 만나지 말아야 했을 친구를 만났다.

귀엽잖아.....

노련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우리 집사 부부는

항상 고양이 간식을 지참한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이 인연을 조금이라도 붙잡아두려면 간식, 특히 츄르가 필수다.



집에 들어와서 자려고 누웠는데

계속 신경 쓰인다.

밥은 먹고 다니냐 싶어서 나갔더니,

그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 녀석이 또 다른 만나선 안됐을 친구를 데려왔다.


그쪽이 우리애한테 츄르를 줬나요?

이렇게 된 이상 우린 한 배를 탄 동료다.

앞으로 너희 밥은 우리가 챙겨주마.

나야 뭐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 사실 매일 밥을 주러 가지 못했지만

고양이를 우상시하는 와이프가 매일 아침에 물과 밥을 채워주는 게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한 두 달쯤 지났을까

이제는 좀 만져볼 수 있을까 하고 손가락 하나를 쑥 내밀었을 때,

죽일 듯이 하악 거리던 녀석들을 보며

아.. 너네 어디 가서 얻어맞지는 않겠다 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서 9월 즈음이 되니 아침, 밤바람이 쌀쌀하다.

이제 반팔 입고 나가지는 못하겠군 아쉬워하는데,

“애기 불쌍하다.... 겨울에 추울 텐데...” 와이프 말을 애써 무시했다.

“얼어 죽으면 어떡해..” 계속 무시.

아니 네 마리 고양이가 거실이고 안방이고 옷방이고 활개를 치는 게 우리 집인데

여기에 또?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2주 전쯤 한창 일하는 중에 와이프한테서 전화가 왔다.

받아서는 안됐을 전화.

“여보, 애 엄마 임신했나봐 어떡해.. 그리고 애한테 하악 거려... 애기 불쌍해...”

아이고 이제 나는 우리 집에 고양이 다섯 마리 있다~ 너네는 없지~ 자랑할 수 있겠구나...


이미 밤마다 정자에서 놀아주고, 아침마다 밥을 준 터라 애기 고양이를 붙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기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기본적인 검사를 마치고,

야생 고양이가 집에 있는 고양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으니 격리용 케이지를 마련하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 하나 샀다.

선생님 본인도 길고양이를 데려와서 격리를 좀 시켰더니

이젠 애교가 흘러넘치는 개냥이가 됐다고...

적어도 한 달쯤 걸린다니 큰 걸로 하나 사야겠네.



데리고 올 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는 사실 꽤 시간이 걸렸고 망설임도 컸지만

일단 데려오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는 일사천리다.

애기가 답답해한다고 하루 만에 격리용 케이지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그리고

아이가 없어졌다.....

저기 어디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겠지 뭐. 별 일이야 있겠어?

두 시간쯤 지나 고양이 화장실 앞에서 애들이 안절부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다.

이 놈 보게..... 크게 될 놈일세.


우리 부부는 그날 밤 내내 애기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은 미미, 뽀뽀, 나나, 동동, 꼬미

얘는 뭔가 세련된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세뇨리따나 셀리나 같은.


어차피 이름을 짓는데 내 의사가 반영될 리는 없었고,

순하게 자라라고 ‘순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제발 이름처럼 순하게만 자라 다오.



이름이라는 건 정말 신기한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내 DNA와 무관하게 내가 이름이 무척 어울리게 자란 것처럼

순이도 급격하게 집에 적응해갔다.

이젠 가르릉 가르릉 거리면서 손길을 허용해주기도 하고,

간혹 말랑말랑한 발바닥을 만져도 모른 체해 줄 정도로.


문제는 우리 넷째 꼬미다.

꼬미를 밤에 길에서 데리고 온 후 2년 동안, 우리 막내는 꼬미였다.

놀아도 꼬미랑 제일 많이 놀아주고 불러도 꼬미를 먼저 간식도 꼬미 먼저.

온 집안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게 자기 운명이라 철석같이 믿었을 이 불쌍한 고양이가

질투를 하는 것 같다.



뭘 보냐옹

순이 적응 잘하라고 들여놓은 케이지에

막상 순이는 하루 살고 말았는데

꼬미가 거기 들어가 있는 게 너무 웃겨서 한참 웃다가

아 이거 글로 남겨놔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글감 고마워 꼬미야.)


저 큰 케이지 안에 들어가면 다시 애기 고양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웃기기도 하고, 너무 순이만 챙겨줬나 싶어 미안하기도 하고.

케이지 얼른 중고나라에 올려버려야지.



지금 와이프를 만나기 전에 고양이는 밤길에 나를 위협하는 무서운 육식 동물이자

뭔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암흑의 존재였다.

그런 내가 결혼 10년 동안 고양이들과 살고 있는 게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고,

도대체가 인간에게 도움이라고는 1도 안주는 이 생명체가

이렇게나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살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다.

뭐 예전에야 쥐 깨나 잡았겠지만 요즘은 장난감을 휘휘 휘둘러도 본 체 만 체 확대된 채 침대에만 붙어들 계시다.


그래도 굳이 인간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억지로라도 짜내서 생각해본다면,

뭐 귀엽다는 점?

상당히 귀엽다.

뭔가 억울하게 생긴 얼굴도 귀엽고 살이 너무 쪄서 헥헥 거리는 것도 귀엽다.

그리고 매일매일 새로운 쇼들을 보여준다.

어떤 프로그램 연출자, 작가라도 이렇게까지 매일 새로운 기획은 못 할 만큼.

추운 날에 고양이만 한 이불도 없고 버릴 핑곗거리가 없던 옷들을 한 번씩 손톱으로 뜯어 주는 것도 경제적으로 보면 이득.

책꽂이마다 고양이 한 마리씩 딱딱 들어가 있으면 인테리어용으로도 훌륭하고,

알람용으로도 이렇게나 끈질기게 깨워주는 시계가 있을까 싶다.




우리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고양이라는 생명체가 인간에게 주는 많은 이토록 무수히 많은 장점들을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지 말고 길에서 데려왔으면 더더욱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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