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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마음의 여유가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사실 간호사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가는 동안 심적 여유를 가진 적이 몇 번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불행하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의 로망도, 추억도 나에게는 없었으니까.


학점을 잘 받아야 남들이 알아주는 '좋은 병원(물론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진 것이다. 예전 글에 그 기준을 언급했었다)'에 취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시험기간에는 밤새도록 공부하기에 바빴다. 전교권에 드는 만학도의 '핫식스 한 상자' 택배에 충격을 받아서 나도 뒤쳐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시험기간 내내 핫식스와 레쓰비로 체내의 수분을 채워왔다. 보다 실습 점수를 잘 받고 싶어서, 교수님께 인정받고 싶어서, 더 큰 병원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에 책이라는 책은 다 읽어보며 컨퍼런스를 준비했다. 그나마 스스로를 좀먹는 이런 방법이 가능했던 것은 방학 때라도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태다. 떨어져 가는 내 체력을 지켜보며 밤샘근무를 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병원은 인력 부족으로 off(쉬는 날)가 부족하다. 쉬는 날에도 NOD를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3교대를 가장한 2교대는 더 허다하다. 그만두면 되지? 맞다. 그만두면 된다. 그러겠다고 수없이 생각해왔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를 공개할까 한다.


첫째, 이전 글에서 언급했었지만 내가 그만두면 다른 인력들의 오프 역시 줄어들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상당히 눈치가 보인다. 고심 끝에 사직을 이야기한 후에는 부서에 소문이 쫙 퍼진다. 그것이 오히려 태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내 경험은 아니지만 커뮤니티에서 많이 봤다) 평소에도 인간 취급 안 해줬으면서, 마지막까지 막 대하는 거지 뭐.


둘째,  병원을 그만두면 뭘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해진다. 대학 교육은 임상간호사를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병원에서 2~3년만 버티라고 말하는 것은 교수님들의 단골 멘트다. 그런 교육을 받으며 취업을 했는데 임상간호사에 환멸을 느낀다면? 내 앞길에 상당히 제약이 걸린다.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 답은 탈간호 하나뿐이다. 이왕 탈간호를 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직업을 택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다들 간호직 공무원, 소방직, 교정직, 공단, 혈액원으로 빠지려고 한다. 하지만 요즘, 공무원 되기가 쉬운가? 공기업에 취업하기가 쉬운가? '내가 시험에 붙을까?', '면접에 붙을까?'라는 생각에 불안해진다. 이처럼 불확실한 미래에 허우적거리기 싫어서 그저 속으로만 수없이 사직을 외친다.


간호사 일은 상상초월로 힘들다. 내가 극한 부서에만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응급실, 중환자실, 응급중환자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 못 버틴다. 내 정신상태가 약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버틴다고 생각해야 마음에 안정이 된다.


못 버티겠으면 물불 안 가리고 그만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만둔다는 의지를 피력하면 아무리 붙잡아도 제 갈길 가게 놔준다. 너는 간호사와 안 어울리니 공무원이 적성에 맞다는 막말과 함께. (사실 처음에 이게 칭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결코 칭찬이 아니다. 너는 빠릿빠릿하게 적응하지 못했다는 뜻의 폭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직은 최후의 수단이다. 남용해서는 안 된다. 남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가 가기 때문이다. 하더라도 이대로는 내가 자살시도를 할 것만 같은 공포감에 휩싸일 때, 진짜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들 때 해야 한다. 남이고 뭐고 간에 나부터 살아야 하니까. 그럼 나는 아직 그만둔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 곳은 다닐만하다는 뜻일까? 사실 그건 아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에 악으로 깡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것뿐이다. 사실 마음속으로 병들어가고 있음을 느끼긴 하는데, 그만둔다고 하면 가족들의 '버티지 못했다는' 시선이 두려워서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도 없지 않다. 나는 첫 직장을 그만뒀을 때 그 무엇보다 실망이 컸던 것이 '가족들의 나를 바라보는 시선' 이였다.


급한 상황에 대처하느라, stable 한 상황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감에, 바빠 죽겠는데(혹은 손이 많이 갈 때) 밥 먹을 시간이 어딨어, 라는 생각에 밥을 굶기도 일쑤다. 그 와중에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께서 밥 먹자고 한 마디 하면, 안 먹는 게 오히려 눈치가 보인다. 나는 일을 제대로 끝내지도 않았는데.. 밥을 먹으면 퇴근도 제시간에 못한다. 그러다가 허둥지둥거리면 왜 이렇게 늦냐고 타박을 받는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뉴스 기사를 보니 간호사의 휴식 시간이 평균 삼십 분이라고 한다. 외래는 점심시간 한 시간 정도는 있겠지만 말이다. 가끔 매체에서 간호사의 처우 개선에 대해 가끔 언급을 하지만 현실은 대선 후보들의 포괄수가제 확대 공약이다.


간호사 커뮤니티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최악의 근무조건에도 간호사들은 인력 부족에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데 거기다가 간병도 오로지 간호사가 한다고? 이것은 정말이지 말이 안 된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마냥 백의의 천사,라고만 생각하는 시혜적인 관점의 집약체가 아닐 수 없다. 씁쓸한 현실이다. 간호사들이 정신적으로 병들어가며 일해도 그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정책은 잘못됐다.


물론 나보다 더 극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징징거리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상처도 잘 받는다. 어릴 적부터 마음이 여리다는 말을 굉장히 많이 들어왔다. 이 직업은 나에게 거대한 왕관과 같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버겁고, 힘들고, 나와는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마음에 여유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내가 쉽사리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 가끔이나마 작은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진심인지 아닌 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다. 수없이 억울한 일을 겪고 최악의 상황에 처해도 그 말 한마디면 힘든 것도 싹 가신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일에 조그마한 애정이라도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숨통 트일 만한 업무강도라면 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텐데. 보다 심적인 여유가 많이 질 텐데. 하지만 일개 평간호사의 이런 푸념을 누가 알아줄까? 내가 이런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간호사의 미담을 구구절절 나열해놓고, 그래서 간호사라서 행복하다, 는 식의 글을 상당히 싫어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말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나는 갑, 을, 병도 아닌 정이다. 내 감정은 다수의 평간호사의 감정을 대변한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간호사의 들춰내기 싫은 자화상이다. 부디 간호사의 처우가 개선되는 법안이 많아져서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저 간호사의 고충을 이 곳에 남겨서 누군가가 내 글을 읽었을 때, '간호사의 처우개선 참 필요하구나.'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덧붙이는 글: 사실 내 글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 내 생각을 적으면 조금이라도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글이 일개 내 푸념이 아닌, 간호사의 처우개선에 조그마한 공헌이라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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