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처럼 하고 살지 않는 인생
- 그건 니가 결혼을 안해봐서 그래.
- 그건 니가 애를 안 낳아봐서 그래.
- 아이가 있으면 또 다르지.
- 좋겠다, 자유로워서.
결혼을 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잘 모르는 듯하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이며,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는 옛말도 있으니까, 결혼을 한 사람은 안 한 사람에 비해 못해본 경험을 해봤다는 자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부러움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뒤에는 은근히 '니가 알아?', '니가 뭘 알아?'라는 마음이 깔려있다. 이건 자격지심이 아니다. 주눅들어서 괜히 그렇게 느끼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겪은 사람들은 그랬다. 결혼의 단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혼 이후의 고생스러움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순수하게 표면 그대로의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 뒤에 깔려있는 이상한 우월감. 나는 그 우월감이 신기했다.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으므로.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결혼? 가족?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나와는 먼 일 같았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해봤다. 하지만 못 만나면 그만이다. 혼자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결혼한 사람들이 거침없이 뿌리는 우월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적어도 남들처럼 하고 살아.
이런 느낌인가?
부럽지 않다는 것이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주변 관계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결혼적령기가 되어도 결혼하지 않는 자에게 돌아오는 건 관심을 위장한 잔소리다. 왜 결혼 안해? 결혼 생각 없어? 아이 생각 없어? 늦게 결혼하면 아이갖기 어렵대. 지금은 젊어서 괜찮지 나중에 나이들어서 혼자 있어봐라, 외로워.
이런 말을 자꾸 듣다보면 인생을 잘못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40살이 되고, 50살이 되면 정말 주위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면 인생의 1순위는 가족이 될 수 밖에 없기에, 나 이외의 주변인들이 모두 결혼을 한다면 나를 1순위로 생각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슬픈 말이지만 부모님은 나보다 먼저 사라지실테니까. 역시 '남들처럼'과 거리가 있는 인생은 어딘가 불안하고 쓸쓸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느낌. 다들 한번쯤은 느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진짜로 홀로 남겨진다면? 살아지는 대로 살아갈 것이다. 혼자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충만하다거나 빛난다거나 따뜻하다거나 완벽하다거나 하는 표현과는 썩 어울리지는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결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따뜻한 인생을 만들고 싶어서 남들 결혼할 때 결혼해버린다고? 말도 안된다.
덜 따뜻하더라도 온전한 마음으로 선택한 길로 가고 싶다. 순수하게, 온전하게,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로 채워나가는 인생. 불안함에 떠밀려 급하게 만든 울타리보다 온전하게 선택한 혼자가 결국에는 더 빛날 거라고 생각한다.
결혼한 사람은 결혼 안 한 사람에 비해 결혼이라는 경험을 더 해보았기에 인생을 더 다채롭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결혼도 스펙이라고 한다. 자발적으로 결혼을 안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미혼인을 보는 세상의 시선은 '결혼 못한 사람'에 가깝다. 마땅히 해야 할 과정을 밟지 못한 사람. 그래서 인생경험이 부족한 사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20대에 결혼한 사람들은 30대에 미혼인 상태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결혼적령기에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적령기가 지나서도 싱글인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모른다. 인생은 한 번만 살 수 있으니까 특정 나이에 결혼한 인생을 선택했다면 그 이후의 결혼하지 않은 인생은 겪어보지 못한 것이 된다. 경험치의 측면에서 같은 레벨이다.
나는 39세 미혼여성이다. '적어도 남들처럼 하고 살아'와는 다른 인생. 이 또한 스펙이다. 스펙은 남들이 흔히 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달성했다는 증명같은 거니까.
39세 미혼여성이 스펙이라면 그 스펙은 어떤 가치가 있는 거야? 라고 물어볼 수 있다. 좋은 질문이다. 39세 미혼여성은 주위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쌓았다. 39세 미혼여성은 세상을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았다. 39세 미혼여성은 주변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강단이 생겼다. 39세 미혼여성은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법, 자기 자신과 소통하는 법을 익혔으며,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나갈 확률을 높였다. 물론 마지막 문장은 기혼이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가족이 있는 상태에서는 주변 사람들한테도 집중해야 하기에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기 쉽지 않다. 이는 미혼인 사람과 기혼인 사람의 특징을 뚜렷하게 가를 만큼 중요한 포인트다.
나의 현황을 이력서에 적는다면 이렇다.
여성/39세(미혼)/무직
세 단어만 보았을 때 당연히 근사해 보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무직인 39세 미혼여성이 어떤 시간을 보내왔고, 어떤 시간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지는 수 개의 단어와 몇 개의 문장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다만 39세 미혼여성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스스로를 대외적으로 표현하는 단어가 근사하지 않아도 마음쓰이지 않는, 진실되고 가득찬 인생을 살고 있는 중이다. 이 시간들이 모여서 이루어질 눈부신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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