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6. 나도 잊어버릴 뻔한 나의 과거
'백수입니다'를 열심히 이야기해도 집요한 질문이 이어질 때가 많다.
- 그래서 전에 무슨 일 했었는데요?
'대충 넘어가기'스킬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을 때는 담백하게 정리해서 설명하면 효과적이다.
- 저는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했고, 디스플레이 하드웨어 개발일을 하다가 그만뒀어요.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요.
이 정도되면 '아,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회사에 다녔는지까지 알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거나, 짚이는 부분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다. 디스플레이 하면 떠오르는 대표 기업으로 S사가 있고, 그 회사가 내가 다녔던 회사다.
- 혹시 S사?
콕 찝어서 물어보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 네. 맞아요.
- 와, 좋은데 다니셨네요. 얼마나 다니신거예요?
- 11년이요.
- 11년이면... 과장?
- 그렇죠. 연구개발쪽은 책임연구원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직급으로 따지면 과장 맞아요.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칠렐레팔렐레 한량같이 보였는데 뭔가 있는 사람인가보네?하는 눈빛. 대기업 과장이었다고? 니가? 상상이 안간다는 눈빛.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대기업 과장은 나라는 사람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하지만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사실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학벌과 직업이 사람을 평가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곤 한다는 사실이 싫다.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나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싶으니까 남들에게도 그렇게 하고 싶다.
학벌, 직업, 재력, 외모 등 내놓고 증명하기 쉬운 부분을 배제하면 어떤 사람을 정의하기가 어렵긴 하다. 측정 가능한 부분 이외의 것으로 한 사람을 표현해보라고 하면? 나 또한 너무 어렵다. 이 사람이 얼마나 따뜻한지, 얼마나 멋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창의적이며, 얼마나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지, 얼마나 꿋꿋하게 시련을 극복해 왔는지, 얼마나 긍정적인지, 얼마나 지혜로운지에 대해 두루뭉술한 표현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대단한 사람인지 별볼일 없는 사람인지는 내놓고 증명하기 쉬운 요소들로 결정되곤 한다.
한때 대기업 과장이었다는 사실이 플러스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꾸 숨기려 하는 건 필요 이상의 후광효과를 떼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과소평가도 과대평가도 싫다. 순수하게 나라는 사람 자체로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대기업 과장' 타이틀은 나에 대한 평판에 영향을 주었다. 나라는 사람이 지금 '쨘' 하고 나타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11년 간의 직장생활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지나온 시간만큼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영향을 무시하는 건 오히려 왜곡일 수 있는데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지금이 중요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중요하듯 과거도 중요하다.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앞으로의 내가 있을 것이기에. 그래. 나 대기업 과장이었지. 일도 참 열심히 했었지. 나조차 잊어버릴 뻔했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대답은 했지만 말하면서도 스스로 실감나지 않았다.
대기업 과장이었다고? 니가?
이건 나의 과거 경력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보내던 눈빛에 어린 말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낯설게 던진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내 과거가 낯설다.
퇴사 후 4년. 일부러 잊고 지내려고 했었던 것 같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사를 다닌 적 없던 것처럼, 원래부터 자유로웠던 것처럼 지내보려 했다. 갇혀있던 11년이 지겨워서 그런 적 없던 것처럼, 그럴 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려 했다.
힘들지만 버티던 나를 떠올린다. 하기 싫어도 해내던 나를 떠올린다. 갇혀서도 꿈꾸던 나를 떠올린다. 괴로움 속에서도 재미를 찾던 나를 떠올린다. 자유롭지 않은 세계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은 자유롭고자 했던 나를 떠올린다.
엄청난 용기를 내서 넓고 자유로운 바깥세상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다.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그 마음을 잊고 지냈다. 어느 순간 그 동안 고생했으니 즐겨도 된다는 도피성 안온함에 젖어들었다.
잘 쉬었다.
이제 다시 움직일 때가 된 것 같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