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작가 Oct 21. 2022

열다섯 살의 인생계획

에피소드2. 계획대로라면 인생 다 살았다.



중학교 때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는 사람?

중학교 때 인생 계획 세워본 적 있는 사람?

중학생일 때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인생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 나이 때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라곤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 먹는 일 정도니까. 그러다가 갑자기 인생계획을 거하게 세울 일이 생겼다. 당연히 나의 의지는 아니었다.




무슨 과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국어 시간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커다란 A3용지 같은 것을 나눠주면서 인생 계획을 적어서 제출하라고 했다. 형식은 그 어렵다는 자유형식. 원래 '알아서 해주세요.'가 가장 어려운 법! 선생님도 특정 형식을 제안하기 귀찮았을 것이다. 인생 목표를 서술형으로 자세하게 적어도 좋고, 표나 그림을 사용해도 좋고, 이야기 형식으로 적어도 좋다고 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멍하게 있다가 선생님의 입에서 '이야기 형식'이라는 말이 나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 인생을 소설처럼 적어보는 거야.


고작 열다섯 살이다.


확실한 꿈이나 미래의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학교만 다니기에도 바빴고 먼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어른이 돼서 뭘 해 먹고 살 수 있을까? 쓸데없이 애어른 기질이 있고, 현실도 모르면서 현실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던 나는 이런 류의 과제가 싫었다. '올해의 목표', '내년의 계획' 정도도 싫은데 심지어 인생계획이라니. 하지만 이야기 형식이라면 조금쯤은 재미있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으니 이상적인 스토리로 적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신나게 써 나갔다.


제출했다가 돌려받았던 종이가 있으면 더욱 재미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없다. 그때는 먼 훗날 다시 보고 싶어 질 것이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 아마 돌려받은 다음 바로 버렸을 것이다. 기억을 살려 복기해보자면 이야기 속 내 인생은 대충 다음과 같이 흘러간다.


내 직업은 변호사 아니면 약사. 남편이랑은 대학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했다. 그러니까 남편도 변호사 아니면 약사다. 대학을 졸업한 해인 24살에 결혼했다. 1년 정도 신혼생활 후 25살에 아들1, 딸1이 생겼다. 출산과 육아로 두 번이나 시간을 소요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쌍둥이로 한번에 끝내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주 화목한 가정생활. 아들이랑 딸은 각각 음악, 미술 쪽으로 재능이 있어서 특기를 살려주었다. 역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는 못했지만 자녀들에게는 해 줄 수 있다. 나의 특기와 적성은 살리지 못했지만 대신 즐겁게 살고 있으니 됐다. 그러다가 40살 기념으로 남편과 해외여행을 갔다. 신나게 여행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편안하게 잠들었을 때, 추락사고로 사망한다. 깔끔한 인생. 아, 멋지다!

이렇게 죽으면 아이들은 어쩌냐고? 아이들은 15살. 지금의(인생계획을 작성할 당시) 내 나이니 다 컸다. 사망보험을 든든하게 들어놓았으니 막대한 금액이 아이들 앞으로 남겨질 것이다. 잘 키워놨으니 넉넉한 재산으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여유롭게 잘 살도록 해. 안녕.


갑자기 40살에 사망해서 읽는 사람이 당황스러웠을 수 있다. 장난으로 썼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진지했다. 15살의 나에게 40살은 너무 먼 미래였고,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었으며, 40살까지만 살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된 내 모습도 상상이 잘 안 가는데, 노인이 되어가는 내 모습은 더욱 상상하기 어려웠다. 40살에 인생 피날레로 해외여행 가서 신나게 놀고, 갑자기 비행기가 추락해서 큰 고통이나 시달림 없이 죽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을 위한 유산까지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디테일과 진정성이 살아있지 않나?


잊고 있던 이 과제가 생각난 건 30대 후반이 되면서였다. 맞아, 나 40살까지만 살려고 했는데 얼마 안 남았네? 생각하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15살에는 그렇게 까마득해 보이던 나이가 곧이다. 40살까지만 살거야? 라고 물어보면 지금 대답은 '아니요'다. 그것도 '절대 아니요.' 지금 39살이고 해가 지날수록 살만해지고 있다. 매해 인생 리즈 경신 중인데 그만 둘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15살의 인생계획 중에 지금과 일치하는 게 하나도 없는 걸? 사망 시기만 일치시킬 필요는 없지!


나는 캠퍼스 커플이었던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 만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도 않았다. 자녀도 없다. 그러니 남편과 아들, 딸과 누리려던 화목한 가정생활도 당연히 없다. 혼자 여유롭고 평온하게 누리는 1인 가정생활이 있을 뿐이다. 아들 딸이 없으니 음악 미술 특기생으로 키울 수도 없고, 남편이 없으니 40살 기념으로 같이 해외여행을 갈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40살에 죽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당시 나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직업은 남들이 괜찮다고 하는 직업 중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덜한 직업, 결혼은 무난하게 대학 졸업 후 결혼 적령기에 하고, 자녀는 무난하게 아들 하나 딸 하나다. 특출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무난한 인생을 살고 싶었나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려 하는 가장 무난한 인생. 무난하지 않은 부분은 40살 사망인데, 그때 당시의 평생은 15년이었으니 살아온만큼 더 살고 그 뒤로 10년을 더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40이란 정말 까마득한 나이였다. 이렇게 시간이 무시무시하게 빨리 흐를 줄은 몰랐지.




계획대로라면 인생 다 살았다. 39살도 이제 두 달 반도 안 남았다. 만일에 40살이 되는 2023년 1월 1일 0시에 죽는다면 남은 시간 뭘 하면서 지내고 싶어? 나에게 물어봤다.


나는 지금처럼 지내고 싶어.


의외의 대답이다. 여행가지 않을 거야? 안해봤던거 해보지 않을 거야? 버킷리스트 같은 거 만들어서 하나씩 해 나가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 안 할 거야? 그런 거 좋아하잖아. 다시 물어봤다.


- 왜냐하면 지금 그렇게 살고 있거든. 지금 내 생활이 여행이고, 버킷이야. 충분히 영화 같고 드라마 같아. 나는 39세 미혼이고, 혼자 살고, 직업도 없어. 그래서 24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지. 무언가에 매어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성이 무한해. 내일 하고 싶은 무언가가 생기면 당장 시작할 수도 있는걸?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듣고 보니 근사하다. 더 화려한 인생이라던가 더 숭고한 인생 같은 것들은 세상에 많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하게, 특별하지 않게도 근사할 수 있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더 근사한 건 내 인생은 지금부터라는 사실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모른 채로 흐르듯 살아왔다면 지금부터는 제대로만 살 거니까. 한걸음 한걸음 딛는 순간을 충분히 느끼면서 살 거니까.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살고 있었던 인생은 열다섯 살의 계획처럼 끝낼거니까.


어쩌면 나는 열다섯 살에 아주 정확한 인생계획을 세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end-



 


작가의 이전글 나와의 카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