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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 Jun 22. 2024

기억은 물건이 아니라 기록으로

20kg를 뺐다. 살이 아니라 옷이다. 입을 옷은 없는데 옷장에 빽빽하게 걸려있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옷들이 미워졌다. 옷장 공기도 텁텁해지기 시작한 초여름 아침이었다. 매서운 눈빛으로 옷걸이를 하나하나 넘겼다. 


곧 네 돌이 되는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입었던 원피스가 있었다. 출산 후에 휴양지에서 입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샀던 옷이다. 계획이나 마음은 언제나 쉽게 바뀌는 법이라, 단 한 번도 몸에 걸치지 않았다. 커다란 종이가방에 담았다.


카멜 컬러의 도톰한 모직 롱코트.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라인의 코트지만 구입해서 딱 그 해에만 입었다. 무거워서 손이 가지 않았다. 앞뒤 옷걸이에 걸린 차콜과 네이비 컬러 코트도 함께 종이 가방에 담았다.


사서 한 번도 입지 않은 금장 단추가 달린 검은색 니트 원피스도 있었다. 인터넷으로 샀는데 택배 상자를 열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품하려는 내게 <그냥 입어, 괜찮아 보이는데> 하고 남편이 말해서 옷장에 넣어둔 옷이다. 그때 반품했어야 했다. 앞으로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옷은 옷장에 들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10년 전 회사 면접을 볼 때 백화점에서 샀던 치마정장세트도 정리했다. 검은색 자켓 어깨에 먼지가 쌓여 회색이 되어 있었다. 소중한 기억은 물건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며 살아야겠다. 


목이 늘어난 흰색 티셔츠 몇 장, 누런 오염이 있는 블라우스 몇 장, 보풀이 일어난 슬랙스 몇 장, 허리가 졸려서 못 입는 스커트 여러 장을 종이가방에 담았다. 


헌 옷 수거 차량이 옷을 가져갔다. 20kg 빠진 옷장은 공간이 넉넉해졌다. 좋아하는 옷들을 꺼내기 쉬운 자리에 놓아두었다. 어깨에 살짝 퍼프가 들어간 하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일자 슬랙스. 몸에 착감기는 검은색 티셔츠와 베이지색 핀턱 슬랙스.  


정돈된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을 때마다 묘하게 기분 좋아졌다. 몇 번의 출근 준비를 한 뒤에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옷으로부터 풀려난 것이었다. 구속되어 있을 때는 몰랐던 자유의 공기였다. 저마다 의미를 품은 물건에서 놓여나게 되어서야, 빈 공간이 주는 여유를 느끼며 내 옷장에 통제력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내 인생은 내가 통제한다.


사진: Unsplashtu 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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