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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 Oct 26. 2024

아무튼, 책

책이란 무엇인가

디지털이 일상의 편리함과 동음이의어가 된 세상에서 여전히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당히 많은 것들을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산뜻하고 가볍게 해낼 수 있는 말도 안 되게 놀라운 세상임에도 굳이 묵직함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전자우편보다 손 편지를 좋아한다. 한 번의 딸각임으로 불편함 없이 쓸 수 있는 볼펜보다는 잉크를 채워가며 써야 하는 만년필과 깎아 써야 하는 연필을 즐겨 쓴다. 가벼이 휴대할 수 있는 전자책이 널렸지만 구태여 종이책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나는 시대와 동떨어진 사람일까 아니면 편한 세상에서 기어코 불편한 것을 찾는, 그래서 관종이 되고 싶은 사람일까.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 시대에 동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현실에 바짝 붙어있고 소심하면서도 남들의 관심이 싫지 않고, 그러면서도 이목이 너무 집중되는 것은 또 불편한 그저 그런 사람이다.(타인의 관심이 영 싫었다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이런 공개된 매체에 글을 쓰는 짓 따윈 애초에 안 했을 것이란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면서도 정작 글은 디지털기기로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인간은 이토록 모순적이다.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책은 나에게 무엇인가. 단어만 조금씩 다를 뿐 뜻은 똑같은 질문을 수차례 해봤다. 상담실에서 해보고 친구한테도 해보고 회사 동료들한테도 해보고 스몰토크가 가능한 모든 곳에서 지나가듯 질문을 던졌다. 끝내 그럴듯한 답변은 얻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내가 시작한 질문이니 납득가능한 답도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이다.


책을 반드시 종이로 이뤄진 물성의 것으로 수집하며 읽으려 고집한다면 장점보다 단점이 당장 먼저 생각날 정도로 거추장스럽다.

- 일단 무겁다. 한국에서 출간되는 책에는 윤기가 도는 제법 고급스러운 종이가 사용된다. 어디서 카더라로 들었는데 실제로 소량의 돌가루가 첨가되어 있다고도 들었다. 무거울 수밖에 없다. 요즘은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해외서적에서 사용되는 갱지느낌의 가벼운 종이에 비할바는 아니다.

- 오며 가며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다소 부담스럽다. 흔들리는 대중교통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서서 읽게 된다면 곡예에 가까운 초능력을 부리게 된다. 이마저도 사람이 덜 차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 관심 있는 책인데 살까 말까 고민하면, 아차 하는 사이에 품절 또는 절판된다. 출판계가 생겨난 이래 흑자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전설을 유지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보아 당연한 일이겠다.(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내내 가뭄이던 출판계에 단비가 되었다. 기쁜 일이다. 이 기쁨이 되도록 오래 지속되길 바라고 있다.)

- 실물책은 너무나 거대한 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안정한 부동산과 씨름해야 하는 한국에서 다량의 책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꼭 그만큼의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 한다면 비용이 올라가거나 이사업체 직원들과 얼굴을 붉힐 일이 생긴다. 아무리 잘 정리를 하려고 해도 증식하는 책을 둘 공간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안락한 공간감과 소유욕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이동진의 파이아키아가 책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롤모델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많고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책만큼은 꼭 물질로, 종이로 된 묶음이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정말로 책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기억 안 나는 언젠가, 당신에게 책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난 그럴듯한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고민할 틈도 없이 찰나의 순간 무심코 내뱉었던 말은 “내 세포의 한 조각처럼 느껴진다”였다. 한참 나중에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봤다. 많고 많은 비유 중에 왜 세포가 떠올랐는가...

동식물의 기본단위가 세포겠고 이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평상시엔 우리가 세포로 이뤄져 있는지 뭔지 굳이 생각하거나 신경 쓰며 살지 않지만 세포는 나를 있게 하는 가장 기초이면서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단위가 아닌가.

나한테 책은 나를 나로 있을 수 있게 하는 어떤 것.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 굳이 신경 쓰며 살지 않지만 손을 뻗으면 언제든 어디서든 손이 닿는 곳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당연한 것.

세포 한 두 개 상실된다고 내가 내가 아닌 게 아니고 책 한 권 못 읽는다고 당장 내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만 無여서는 안 되는 그런 것...

나한테 책은 그런 거여서 책은 책이어야만 하나보다.


전자책, 이북도 책이 아니냐 물으면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세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듯이 책은 종이책이어야만 나에게 책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책의 냄새, 두께감, 표지의 반들거림, 종이의 질감, 종이를 넘길 때 스치는 소리와 손끝에 닿는 느낌, 책 한 권의 무게감. 이런 것들이 있어야만 비로소 책을 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래야만 온몸으로 책을 향유할 수 있다.


책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책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 앞에 그럴듯하고 근사한 답변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아무튼 책이어야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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