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사피엔스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벽돌책 한 권이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위대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의 길이가 짧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길다고 말하기도 조금은 애매한 시점을 지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100세쯤 된다고 하던데(끔찍한 일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전체 수명길이에서 절반을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와있는 셈이다.
조선시대였다면 양반이었든 평민이었든 천민이었든, 계급 불문하고 배우자가 있어야 하고 장성한 자식도 여럿 있어야 할 나이를 한참 지났건만 다행히 21세기에 태어나 결혼은 고사하고 어린 친구들이 즐겨 입을 법한 디자인의 옷을 나도 주워 입으며 차림새로 나이를 대충 감추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본연의 숫자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라서 어쨌든 제법 삶의 경험치가 쌓여있고 남들 눈엔 하찮아 보이더라도 나름 견고하다고 여기며 구축해 온 내 세계가 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600여 쪽에 달하는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세계가 산산이 조각나 부서진 현장을 지켜보는 중이다. 처참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입안 가득 맴도는 쓴맛은 사은품으로 딸려왔다. 책 한 권에 이토록 망신창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새롭다. 이럴 수가 있나.
지금까지 내가 쌓아왔던 것은 무엇이었나. 내 생각이 정답이라거나 무조건 옳았다거나 하는 오만을 지니며 살아온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니겠거니 믿으며 살아왔다. 이 정도의 견고함은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나. 세계가 조각나 재건축되고 있는 현재, 내 세계를 온전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부서진 잔해 속에서 쓸만한 조각을 찾아내 새것과 이어 붙이며 새로운 탑을 짓고 있다.
오래된 전래동화가 생각나는 경험이기도 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겉옷을 벗도록 하기 위해 해와 바람은 내기를 했고 결국 이긴 것은 칼 같은 바람이 아니라 따듯한 햇살이었다던가.
인간을 변화하고 움직이게 하는 특효는 악의나 분노보다는 연민/이해/공감/선의 따위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상당히 진부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저자는 600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를 두고 인류는 오랫동안 논쟁했다.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를 두고 어느 때는 선이 어느 때는 악이 우위를 번갈아 차지하며 인간을 농락했다. 이 논쟁에서 나는 인간의 선의를 믿고 싶으면서도 한 편으로 태어나기를 본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태어나 사회화와 교육을 통해 선의를 배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린아이들을 어른의 시선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일견 이기적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내 생각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들어온다.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설득을 하는데 필요한 분량이 600여 페이지라니.
새삼 지금의 현대사회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다.
인류의 성악설을 믿게 하는 데에는 그리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선의를 말하고 설득하고 믿게 하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소 충격적이고 의미 있는 읽기였고 많은 파편을 남겼다는 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다.
다만, 이 책과 책의 저자를 온전히 믿고 지지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여전히 나는 의심을 온전히 지울 수가 없다. 저자의 주장이 설령 다 맞다고 친다면,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폭력의 현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혼란스럽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쟁과 학살로 무고한 목숨이 스러지는 중이고 지금 우리 땅에선 혐오와 비난과 조롱이 만연하다. 내 옆을 스치는 사람을 마음 놓고 믿을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충전된 인류애가 현실을 보면 다시 사그라든다. 애써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고 생각한 내 세계는 부서지고 다시 짓고를 반복하는 중이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봐야 하는가.
내 삶과 내 세계와 내 주변을 평화롭게 혹은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
차라리 책을 읽지 않았다면 좋았을까? 아니, 그렇진 않다.
아니다. 잘 모르겠다.
70억 지구인들과 함께 하는 조별과제를 원활하게 해내는 데에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정작 읽어야 할 필요성이 다분한 사람들은 이런 주제엔 관심이 없다는 게 21세기 인류의 불행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