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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Feb 09. 2023

우리는 각자의 얼음덩어리에 기대어 살아간다

내 방 책상 여행기 번외 편_ 신비의 돌 게르마늄




원소번호 32.

원소기호 Ge.


도체와 부도체 중간 영역에 속하는 물질로 전자 산업에 활용되는 광물(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에도 만난 기억이 없는 이 원소를 처음 접한 건 의외의 장소였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서울 고척동 시어머니 댁에서 그와 처음 만났, 아니 그것을 처음 보았다.


게르마늄은 다양한 모양과 형태로 집안 곳곳에 있었다. 문자 그대로 '집안 곳곳에'. 거실에는 텔레비전 양옆 테두리와 거실 바닥 이곳저곳, 주방에는 물병 안, 전기밥솥 안, 과일 바구니 안. 그리고 각 방에는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참고로 내가 가장 놀란 곳은 카레를 끓이는 냄비 안이었다. 카레를 푸려고 국자를 퍼 올렸더니 팥죽에 들어가는 새알 같은 돌덩어리가 똭! 바구니의 기능을 하는 곳에는 늘 게르마늄이 담겨 있었다.


나로선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다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게르마늄이 들어간 물건을 다 꺼내 놓는다고 하면 30평대 아파트 거실과 주방은 족히 차고도 남을 것이다. 시어머니에게 게르마늄은 만병통치약이고 흡사 ‘건강의 근원’이다. 게르마늄을 텔레비전에 붙이면 전자파를 막아 주고, 물병에 넣으면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나쁜(?) 물질을 흡수해 주고, 밥을 안칠 때 넣으면 밥맛을 좋게 해 주고, 과일이 담긴 바구니에 넣으면 과일을 상하지 않게 해 준다. 물론 나의 시어머니 피셜.

 

한동안 거실에는 500원짜리 동전만 한 육각형의 납작한 돌들이 종과 횡을 맞추어 좌르륵 붙어 있는 커다란 전기 매트가 있었다. 추운 날 그 위에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어지는 마력의 매트였다. 실제 나는 그 매트에서 가끔 정말 달콤한 낮잠을 잤다. 시어머니는 그 매트를 우리 세 가족이 가면 우리 가족에게, 조카들이 오면 조카에게, 형님네가 오면 형님에게 내어 주신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만 내어주는 건 틀림이  없다. 



시어머니가 쓰시는 게르마늄 침대. 저 육각형의 돌에 무슨 마법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시어머니에게 게르마늄 팔찌와 목걸이를 받기도 했다. 임신 중에 손이 너무 저려 잠을 못 잘 정도였는데, 효과가 있을 거라며 자신이 보관해 오던 것들을 주셨다. 추가로 목 보호대(초크목걸이처럼 생겼다)와 전기방석도 챙겨 주셨다. 시어머니의 믿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해 여름 내 팔찌를 차고 있었다. 물론 손 저림이 제발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목걸이는 차마 밖에 하고 다니기는 힘들어 집에서만 했다. 


시어머니가 게르마늄을 신봉하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어디를 가든 동행하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들(나의 남편)이 결혼을 해 혼자 살게 되자, 자기 몸 지킬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판단을 한 시어머니는 우연한 기회에 동네에 있는 의료기기 체험장을 다니시게 됐다. 그곳에서 여러 기기들을 체험했는데 시어머니가 앓고 있던 무릎 통증에 효과가 있는 기기를 만났고, 걷기도 힘들었던 증상이 차츰 나아져 건강이 많이 회복된 것이었다.

 

사람이 두 발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일단 삶에 활력이 돈다. 더 건강해져야겠다는 생각에 코로나 전에는 매일 아침 산책도 다니셨다. 그리고 벌써 8년째 아파트 노인정에서 일주일에 세 번 점심을 차리는 일도 하고 계신다. 어머니 연세에 연금이 아닌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해가 바뀔수록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지만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계신다.

 

예상한 대로 각종 게르마늄 제품은 시어머니가 모두 그 체험장에서 사 오신 것들이다. 나는 시어머니가 체험장 사람들의 허위 과장 광고에 속아 그것들을 사 온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과학적 사실이야 어떻든 시어머니가 효과가 있다고 ‘직접 느끼고 판단해’ 구입한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게르마늄 사랑이 걱정되는 일도 있었다. 주방 칼에 손을 크게 베이셨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게르마늄 가루를 물에 개어 그 반죽을 다친 곳에 바르고 반창고로 붙이는 셀프 치료를 하신 거다. 나와 남편은 그걸 보고 안 된다며 기겁을 했지만 정작 본인은 다 나아간다며 계속 이렇게 치료하면 잘 나을 거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 결국 상처가 낫긴 했는데 정말 게르마늄 반죽 덕분인지 시간이 해결해 준 건지는 뭐라고 판단을 못하겠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굳게 믿고 있는 것이 있다. 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나의 시어머니처럼 눈에 확연히 보이는 물질일 수도 있다. 또는 각종 무형의 것들일 수도 있다. 이 무형의 것은 징크스일 수도, 가치관일 수도, 선입견이나 편견일 수도 있다. 모두 자신의 경험으로 단단하게 만든 거대한 얼음덩어리 같다. 때론 남들이 보면 쉽게 녹을 것 같은 얼음덩어리는 너무 거대해 망치로도 부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그것에 기대어 살아간다. 


올해 여든 하나이신(하반기가 되면 다시 79세로 젊어지실 예정) 시어머니는 내가 직접 보아온 그 연세의 할머니들에 비해 확실히 활력이 넘치시는 분이다. 난 진심으로 원한다. 시어머니가 오랜 기간 더 지금의 활력을 잃지 않으시면 좋겠다. 



* 덧붙이는 말

: ‘게르마늄’은 나에게 여전히 낯선 말인가 보다. 내가 이 글을 쓰며 열 번 정도 ‘게르마늄’이라는 말을 썼는데 키보드로 한 번에 바로 쓴 적이 거의 없다. 초반에는 이상하게도 계속 ‘게류마늄’, ‘게르마튬’, ‘베르마늄’, ‘게라뮨’ 등으로 써졌다. 난 그동안 베류마튬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2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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