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호호 오가는 대화 사이로 간간이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지은은 자신의 방에 우두커니 앉아 간간이 들려오는 민욱의 목소리에 흠칫하며 떨었다.
" 에이, 설마... "
" 내가 꿈을 꾼 건가...? 아닌데, 너무 생생했는데... "
" 엄마한테 말해도 될까...? 아니야, 그냥 나만 모르는 척 하면 되지 않을까...? "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지은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물음표들과 의심이 뒤섞여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 속에는 과연 부모님이 자신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도 자리했다.
되려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혼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지은의 마음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똑, 똑, 똑.
천천히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지은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끼익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리며 밖에서 들리는 소음들이 잠시 커졌다 작아졌다.
" ... 자니? "
" 지은아, 민욱이 간다는데 인사는 해야지? "
" ... 지은아? "
" 큰엄마, 괜히 깨우지 마세요. 저 괜찮아요, 많이 피곤한가 보죠. 그냥 두세요. "
" 쟤가 오늘따라 왜 저런담? 매번 너만 오면 그렇게 좋아해 놓고는. "
" 아, 아까도...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어요. 저 이만 가 볼게요. "
덜 닫힌 문 틈을 힐끔, 힐끔 쳐다보며 엄마를 말리는 민욱의 모습이 보인다.
빠르게 문으로 향하는 민욱의 발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귓가에 맴도는 나지막한 민욱의 목소리에 찬 바람이 살갗에 스치듯, 모든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이불속의 지은은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내쉬는 숨조차 멈추고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그 이후로 민욱은 휴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지은의 집을 찾았다.
지은의 엄마는 살갑게 굴면서 아들 노릇을 톡톡히 해주는 민욱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점점 경계를 낮춰 갔다.
처음에는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냐며 핀잔을 주던 아버지도 어느새 민욱에게 마음 한 켠을 내어 주고 있었다.
지은은 그날 이후로 자꾸만 부모님의 눈을 피해 교묘히 자신과의 스킨십을 시도하는 민욱으로 인해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민욱이 찾아 올 때마다 지은은 다시금 재생되는 그날의 공포에 매일 밤 악몽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 번 심어진 검은 의심은 지은의 두려움을 양분 삼아 제 몸집을 키워 나갔다.
" 큰아버지, 제가 내일 근처에서 볼 일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오늘만 여기서 자고 가도 될까요? "
" 저기, 그게... 아무리 민욱이 너라도 그건 좀... "
" 갑자기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저도 민폐라는 것은 아는데... 제가 집에 들렀다가 다시 와서 볼 일을 보고 가기에는 복귀 시간까지 여유가 없어서요. 그렇다고 모텔에 가기도 좀 그래서... "
갑작스러운 민욱의 부탁에 엄마는 지은을 힐끗 보며 만류하였다.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지은과 민욱의 사이의 묘한 기류를 어렴풋이 느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식탁 위에는 정적이 내려앉았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식기들 소리뿐이었다.
" 민욱아 미안한데 아무래도 그건 어렵지 않을까 싶어, 네가 마땅히 잘 곳도 없고... "
" 저 소파에서도 잘 자요. "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손님인데... "
" ... 그렇게 해라. "
조용히 식사를 이어가던 아버지가 허락을 했다.
지은은 아버지의 허락이 믿기지 않는 듯 식사를 하던 움직임을 멈추었고, 엄마는 굳어버린 지은과 아버지 사이를 번갈아 보며 조용히 눈치만 보았다.
" 여기서 대구까지 왕복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하지. 그러다 복귀 시간 놓치면 큰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당신, 조카도 자식이야. 하물며 다른 아이도 아니고 민욱인데 뭘 걱정하나. "
"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마땅히 재울 곳이 없는데... "
" 아, 소파에서 잔다 잖아. 당신은 얘 이불이나 잘 챙겨 주고.
지은이는 오빠 불편하지 않게 애지간하면 새벽에 거실 돌아다니지 말아라.
방을 내주지는 못 할 망정... "
" 감사해요 큰아버지. 제가 괜한 부탁을 드려서... "
" 됐다, 네가 오죽하면 그런 소리를 했을까. "
숟가락을 내려놓은 아버지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숨을 내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은은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민욱이 괜한 말을 해서 죄송하며 엄마에게 사과를 했고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은의 눈에는 그 모습조차 이질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민욱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의심의 색은 짙어져만 갔다.
엄마는 어색하게 웃으며 지은의 얼굴을 살피다 아버지를 따라 방에 들어갔고, 두 분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민욱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피식 웃었다.
" 그냥 가... "
지은은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꽉 쥐며 조용히 말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함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손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었다.
" 으음... 싫은데? 내가 왜? "
" 볼 일 있다는 것 거짓말이잖아. 그냥 가 제발... "
" 거짓말 아니야, 볼 일 있어."
귀엽게 투정을 부리는 동생을 보듯 웃으며 말하던 민욱은 지은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움찔거리며 피하는 지은을 보며 더욱 가까이 다가서서 결국 지은의 머리카락을 손에 넣고는 천천히 문질렀다.
지은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에 입술을 짓이겨 물며 새어 나오는 경멸을 속으로 삼켰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는 것이 두려웠다.
방에서 울리는 시계 초침 소리에 맞춰 심장이 널을 뛰었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 부모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은은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 춥지는 않겠니? "
" 에이, 한 겨울도 아닌데요. "
" 소파도 좁아서 불편할 텐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호텔을 잡는게... "
" 당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요. 넌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쉬고. "
" 죄송해요, 큰아버지. 괜히 폐만 끼치고.. 다음부터는 그냥 방 잡는 게 나을까 봐요. "
" 녀석, 별소리를 다 하네. 너랑 나랑 남이냐? 언제든 와서 자고 가도 되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라. "
밖에서 들리는 대화가 지은의 가슴에 칼처럼 꽂혔다.
가슴을 옥 죄는 듯한 고통에 숨이 가빠져 왔다.
손끝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아릿한 아픔마저 느껴졌다.
어느새 파고든 손톱이 깊게 우물을 만들며 가시처럼 박혔다.
날개가 찢겨져 새장 안에 갇혀 버린 새처럼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새근새근 숨소리만 들려오는 고요 속에, 가끔씩 들리는 발소리와 부스럭 거림도 사라진 시간.
저도 모르게 감긴 눈으로 선잠에 빠진 지은에게 조용한 공포가 찾아왔다.
톡, 톡, 톡.
천천히 방 문을 두드린 공포는 잠시 기다리더니 다시금 톡, 톡, 톡 소리를 내었다.
지은은 눈이 번쩍 떠졌지만 이내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두려움에 몸이 벌벌 떨렸지만 가까스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입을 틀어막으며 새어나가는 소리를 막았다.
몇 번 더 소리가 난다면 적어도 부모님 중 누구 하나는 잠에서 깨시겠지.
덜컥, 문 손잡이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는 소리에 평소 잠귀가 밝으신 엄마, 아빠가 듣고 깨시기를 바랐다.
잠깐의 정적 속에서 지은은 처절함을 담아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