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를 시작하기로 한 뒤, 지은은 평소와는 다른 장소로 안내되었다.
입원을 해 있던 병동을 벗어나며 그녀는 오랜만에 창문 밖이 아닌, 직접 마주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햇살이 지은의 창백한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이 부시는 반짝임에 살짝 눈앞을 가리던 지은은, 무언가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병원 복도를 걸으며 들리던 소음과는 다른, 작은 새들의 소리와 나뭇잎이 스치는 사소한 소리들이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오랜 시간 닫아 두었던 문 너머의 세상을 엿본 듯, 두려움과 설렘이 엇갈려 생경하게 느껴졌다. 밝고 화창한 그 모든 것들이 지은에게 낯설게 다가왔다.
" 어서 와요, 지은 양. "
별관 안으로 들어와 잠시 걸었더니 문 앞에서 기다리던 재아가 보였다.
지은은 익숙지 않은 공간에 와서 인지, 자신을 맞이하는 재아를 보면서도 살며시 느껴지는 불안감에 멈칫하였다.
" 여기는 어디...? "
" 앞으로 최면치료는 이 안에서 함께 할 거예요. 아무래도 기존의 상담실은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지은 양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어요.
최대한 지은 양이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준비해 봤는데... 어때요? "
지은은 재아의 말에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오렌지빛 조명과 깊은 자주색 벨벳 벽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중앙에는 푹신함이 눈에 보이는 긴 소파 베드와 작은 램프가 올려진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늘어선 책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묵직하면서도 아늑한 방의 분위기가 긴장하고 있던 지은의 마음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은은하게 퍼져 있는 우드향은 무겁게 느껴지던 공간의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했다.
지은은 조용히 소파에 앉으며 공간이 주는 따듯함에 잠시 위안을 얻었다.
" 여긴... 생각보다 아늑하네요. "
" 다행이에요. 지은 씨가 편하게 있을 수 있길 바랐거든요. "
재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지만, 시선은 한결 진지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들고 지은을 바라보았다.
" 지은 양, 치료를 시작하기 앞서 어떻게 진행될 건지 간략하게 알려줄게요.
최면치료는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기억과 감정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강렬한 감정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제가 곁에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치료는 지은씨의 의지에 따라 진행되며, 언제든 중단할 수 있다는 것. 기억하죠? "
지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재아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은이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내 목소리에 집중해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그렇지, 잘하고 있어요. "
재아는 지은의 긴장이 채 풀리지 않아 보여 걱정이었지만,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지시에 따라 집중하는 그녀를 유심히 살피며 신중을 기했다.
" 숨을 쉬다 보면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느껴지나요? "
" ... 그런 것 같아요. "
" 잘했어요. 그럼 앞으로 주욱 이어진 길을 따라서 이동할게요. 어두운 길 끝에 작은 문이 보일 거예요. "
" 네... 낯이 익어요... "
지은은 재아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 느껴졌다.
물속에 깊이 잠긴 듯, 재아의 목소리가 물결처럼 웅웅 울리며 퍼져 나갔다.
낯익은 문 앞에 선 지은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 자, 이제 문을 열고 나가 볼 거예요, 문을 열었을 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 줄래요? ]
지은은 문을 열면 무언가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에, 문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차마 손잡이에 손을 뻗는 것조차 쉽사리 할 수가 없었다.
지은은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지긋지긋한 악의 고리를 끊고 싶은 열망이 들었다.
' 괜찮아... 이건 꿈이 아니야. '
지은은 눈을 꼭 감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마침내 서늘한 손잡이를 향해 손을 내밀고는, 조심스럽게 돌렸다.
끼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그때까지도 지은은 눈을 뜨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본가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달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푹신한 침대와 늘어선 책장이 익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익숙함 속에서도 어딘가 묘하게 생경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은은 시선은 방 안을 둘러보다 자연스레 침대로 향했다.
잘 정돈된 침대 위, 자신이 본 적 없는 핸드폰 하나가 놓여 있었다.
" 이게... 뭐지? "
[ 지은 양, 무엇이 있나요? ]
" ... 핸드폰... 내가 모르는 물건이에요. "
[ 그렇군요, 지은 양의 기억 속 물건이니까 분명, 그 안에 우리가 찾는 조각이 있을 거예요. 천천히 살펴보세요. ]
익숙한 방 한 가운데 놓인 이질적인 존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든 지은은 꿀꺽, 숨을 삼켰다.
화면을 켜자, 배경화면은 그녀 자신의 사진이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 해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
그 순간, 전신을 휘감는 섬뜩함에 지은은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느껴지는 어색한 위화감에, 지은은 의문과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조작해 보았지만, 열 수 있는 어플은 단 하나. 갤러리뿐이었다.
" 왜... 갤러리만? "
지은은 재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에 휩싸였다.
마음은 더 이상은 알고 싶어 하지 말라며, 당장 여기서 멈추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지은은 끝내 떨리는 손 끝으로 갤러리 아이콘을 눌렀다.
화면이 잠시 검게 변했다가, 갑자기 수많은 사진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한 장, 한 장. 사진 속 여자는 얼굴을 가리며 울고 있거나, 고통에 휩싸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확인하던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렸고,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은 점차 빨라져만 갔다.
" 이, 이건... 뭐야...? 왜 이런 게 여기 있어...? "
[ 지은 양, 그 속에 무엇이 있던, 무서워하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봐도 돼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를 기억해요. ]
재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지은의 귓가에 닿기 전에 저만치 멀어져 갔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넘기던 순간, 갑작스레 화면이 멈췄다.
그 순간, 화면이 마치 영상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면 속 장면이 그녀의 눈앞을 가득 채웠고, 지은은 숨을 멈춘 채 어지러움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 애썼다.
창문 너머로 스며든 서늘한 달빛, 뜨겁고 농밀했던 감촉.
맞닿아 오던 열기와 달큰하면서도 끈적한 숨 내음.
더불어, 자신의 위에 엎드려 짓누르던 묵직함과 소름 끼치게 훑으며 지분대던 손길까지...
그녀의 머릿속으로 감춰졌던 그날의 기억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 아... 아니야, 아니야...! 제발... 제발 멈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