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은 자신을 막아 세우는 재아를 지긋이 보았다.
너무도 평안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 속에 온기라고는 모래 한 점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재아의 옆을 지나쳐 문을 열고 나서는 지은의 모습은, 그 어떤 감정도 그녀에게 닿을 수 없는 진공의 상태와 같아 보였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긴장감이 감도는 병원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한 남자가 안전요원들과 대치하며 격한 몸짓으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민욱이었다.
그의 얼굴은 초조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
" 이거 놔! 지은이를 만나야 한다고, 지은이 내놓으라고! "
지은은 그의 모습을 보며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이 민욱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민욱은 마치 감각적으로 그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이 그녀만을 오롯이 담아내었다.
거세게 반항하던 민욱은 갑자기 멈춰 섰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그는, 그녀를 눈 속에 가두느라 정신이 없었다.
흔들리는 그의 눈에는 안도와 격정이 뒤섞여 있었다.
" 찾았어... 드디어, 드디어 내가 널 찾았어... "
지은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복도에 울려 퍼졌지만,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민욱의 몸짓 하나, 하나가 마치 그녀를 붙잡으려는 덫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민욱은 지은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안전요원들이 그를 막으려 하자, 지은이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
" ... 괜찮아요. 단 둘이 이야기할게요. "
요원들은 주저하며 물러섰고, 민욱은 한숨을 몰아쉬며 막아선 요원들을 날카롭게 쳐다 보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 지은아... 드디어 만났어. 시간이 없어, 우리... "
" 따라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면 안 되잖아? "
지은은 단지, 차갑게 말하고서는 뒤돌아 걸었다.
민욱은 그녀를 따라 걸으며 냉랭한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상했지만, 한 순간도 그녀를 뒤를 놓치지 않았다.
지은은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섰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와닿았고, 화창한 하늘이 눈 부셨다.
민욱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얕은 원망을 실어 말을 꺼냈다.
" 왜 날 그렇게 밀어냈어...? 왜 그렇게 숨었던 거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
지은은 유유히 걸어가, 난간 옆에 멈춰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과거의 반짝임을 찾을 수 없는, 차갑게 얼어붙은 공허함만이 자리했다.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려는 그를 바라보며 그들 사이에 현실을 불러들였다.
" 오빠, 이제 그만 놓아줘... 이건 사랑이 아니야. 집착이야. "
" 아니야! 네가 날 피해 숨어 다니는 동안 끝없이 확인했지만... 그날, 우리는 사랑이었어. "
" 정신 차려. 언제까지... "
" 시끄러워! 네 부모님도, 그 누구도 우리를 이해 못 해. 우린 둘이서만 행복해질 수 있어. "
민욱은 지은이 불러들인 현실에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자신을 향해 공격을 하는 지은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지은아, 내가 다 알아봐 뒀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돼! 사람들 오기 전에 나랑 같이 가자... 응? "
난간 끝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마치 이미 예정된 길을 걷는 것처럼, 단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홀가분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 끝에 실리는 무게감은 오히려 모든 걸 내려놓은 가벼움 같았다.
" 오빠. "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지은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한 올, 한 올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마치 허공을 노니는 깃털처럼 부드러웠고,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청아해서 투명하게 보였다.
" 사랑이란 건 강요하지 않는 거래... 오빠가 사랑한 건 내가 아니라, 오빠 자신일 뿐이야."
" 아니야, 난 널 사랑했어!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
" 난 오빠가 원하는 걸 줄 수가 없어... 이미 텅 비어 버려서 아무것도 없거든. 그러니까... 이제 날 좀 그만 놓아줘. "
그녀는 처음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고, 그저 흐릿하기만 했다.
지은의 말은 민욱을 마치 전율처럼 흔들어 놓았다.
그녀를 잃을 것 같은 절박함에 민욱은 거의 울부짖듯 말했다.
" 아니, 그럴 수 없어... 네가 없으면 난... 난 무너질 거야. "
" 오빠는 끝까지 자기감정만 보이는구나. 난 이미 볼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내가 느꼈던 고통도, 내가 어디까지 무너져 내렸는지도 전혀 안 보이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이젠... 정말로 끝내자, 우리. "
차분한 지은의 말은 칼날이 되어 민욱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손이 난간에 닿았다.
금속은 싸늘했고, 그 차가움이 손 끝으로 스며들었다.
그 차가움 마저 위로처럼 느껴졌지만,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는 필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옅게 가리운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저 빛은 나를 위해 빛나는 걸까? 아니면, 이 마저도 더럽혀져 넝마가 되어버린 나를 조롱하는 걸까.
' 그래도... 충분히 버텼잖아. 모든 걸 견뎠어. 하지만 더는 무리야... '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민욱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 소리치며 간절함과 공포에 휩싸여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자신을 위한 진심을 발견할 수 없었다.
' 매일 반복되는 악몽,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모습... 그 목소리, 그 손길, 그 숨소리까지... 이 모든 게 얼마나 더 나를 짓밟아야 끝날까? 이건 사랑이 아니야... 사랑은 이런 게 아니야. '
그녀는 다시 난간 너머로 시선을 옮기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살며시 느끼고 있었다.
발끝을 난간 위로 천천히 올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마지막으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폐 안을 가득 채우는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에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 안 돼, 지은아! 거기서 멈춰! 돌아와! "
민욱은 뭔가를 깨달은 듯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지 못한 그녀에게서 미약한 슬픔과 함께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 보였다.
' 안녕, 엄마 아빠. 죄송해요. 그리고... 안녕, 오빠. '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민욱의 시선 속에 마지막으로 선물을 남겨 준 그녀는, 그렇게 천천히 공중으로 몸을 맡겼다.
몸이 붕 떠오르자, 그녀는 포근함과 동시에 주변을 감싸는 고요를 느꼈다.
순간이 길게 늘어진 듯한 정적 속에서, 그녀의 모습만이 난간 너머로 가벼이 사라졌다.
지은이 사라진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욱은 무릎이 꺾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은 허공을 움켜쥐려 애썼지만,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왜... 왜...? "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머리를 움켜쥐는 그의 손가락이 울분에 감겨 떨려 왔다.
그를 짓누르는 죄책감은 무게를 더해 갔고, 지은의 마지막 미소가 그의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 한켠에서는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려는 집착이 꿈틀댔다.
" 아니야... 이런 걸 원했던 게 아니야...! "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손바닥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흔적 같은 공허함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있었으나 없어져 버린 그녀의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은이 민욱의 눈 속 감옥에서 풀려나 평온을 향해 발을 몸을 맡기던 시각.
재아는 병원 복도를 빠르게 내달렸다.
그녀의 뒤에는 지은의 부모님과 민욱의 엄마가 뒤따랐다.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은 다급한 발걸음과 불안한 숨소리를 내며 옥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제발, 지은아. '
재아는 밀려드는 불안감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운 옥상 문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무거운 문을 밀어내려는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민욱의 목소리가 그녀를 막아 세웠다.
민욱의 울부짖는 목소리는 절박함과 광기로 뒤섞여 있었다.
재아는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늦어 버렸다는 절망감에 등골이 오싹했지만, 아직은 아닐 거라며 부정을 하고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