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 양! 돌아와요! 제 목소리를 들으세요! "
재아는 떨리는 손으로 지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지은의 얼굴은 마치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고통과 혼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지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에는 공포가 어렸다.
그녀의 표정은 깊은 심연 속으로 더욱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재아는 차오르는 죄책감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 내가 이 치료를 권하지 않았더라면... '
지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본 재아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 지은 양! 이건 기억일 뿐이에요, 현실로 돌아와야 해요! "
재아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퍼져 나갔지만, 지은의 의식은 여전히 그 깊고 어두운 심연에 갇혀 있었다.
그 순간, 지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버리더니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입술은 미세하게 열렸다.
" 아... 아니야... 안 돼... "
재아는 너무도 작게 새어 나온 그녀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고통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듯 지은에게 외쳤다.
" 지은 양, 돌아와요! 여기, 제 목소리를 들어야만 해요! "
지은은 몸을 한 번 격렬히 떨더니 갑작스레 눈을 떴다.
무엇을 본 것인지 그녀의 눈동자는 흐려져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한참 재아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주르륵 한줄기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 ... 전부... 다 봤어요. 이제... 다 기억났어요. "
지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속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
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후회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지은의 아픔을 위해 선택했던 치료였것만, 자신으로 인해 끔찍한 기억을 다시금 겪었을 지은을 생각하니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인가 자괴감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지은은 노을이 가득한 병실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녀의 꿈은, 반복적으로 과거의 그날로 지은을 데리고 갔다.
꿈속에서 느껴지는 숨 막히는 무게와 메마른 울음소리는 현실에서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재아는 창 밖에서 미끄러져 들어오는 어둑한 붉음 속에서 지은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지은의 어깨는 공포에 물들어 들썩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빈 공동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 지은 양, 식사를 좀 하셔야 해요. "
재아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지만, 껍데기만 남은 듯한 지은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고, 핏기가 사라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이 재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 ...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었어. "
재아는 지은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건들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재아는 눈앞에 있으나, 없는 것이 되어 버린 지은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다음날 아침.
병원에 걸었던 전화 한 통이 초래한 것은 서로를 향한 분노와 날 선 비난이었다.
면회가 금지된 지은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걸었던 전화는 집안에 커다란 폭탄을 떨어트렸다.
[ ... 현재 강지은 양에 대한 치료 결과가 매우 안 좋습니다. 의식 깊은 곳으로 지워버렸던 기억이 원인으로 파악되어 최면 치료를 진행했으나, 강한 충격으로 인해 현재 마음이 완전히 죽어 버린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어요. 자세한 부분은 병원으로 오셔서 직접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이게 다 민욱이 때문이잖아요! "
" 그럴 리가 없어... 우리 민욱이는 그런 애가 아니라고! "
" 뭐가 아니에요? 민욱이 때문이 아니면 왜 우리 지은이가 이렇게 된 건데요! "
" 둘 다 말 조심해! 당신도 그만하고! "
"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당신은...! "
" 오빠나 가만히 있어! 나 참,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린것이 얼마나 천박하고 싸게 굴렸으면 내 아들이 그랬겠어? 지가 먼저 다 벗고 달겨 들었을지 누가 아냐고! "
" 뭐, 뭐라고요...? "
" 그만들 좀 하라고! 밖에서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들 이래! "
" 내 새끼가! 내 새끼가... 마음이 죽어 버렸다잖아...! 당신은 애가 망가졌다는데 어떻게 그래요...?
민욱이, 그 아이가 우리 딸을 망가뜨렸다고요! "
지은의 엄마는 울분을 토해내고는 흐느끼며 무너져 내렸고, 거실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지은의 아버지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깊은 한 숨을 내 쉬었고, 민욱의 엄마는 끝까지 자신의 아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에 화를 참지 못했다.
그 순간, 집 현관문이 열리며 민욱이 들어왔다.
민욱은 거실에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안으로 들어섰다.
" 큰 아버지,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어, 엄마는 왜 여기에...? "
민욱의 엄마는 민욱을 보자마자 억울한 듯 소리쳤다.
" 민욱아, 잘 왔다! 네 큰 엄마라는 사람이 너한테 뭐라는 줄 아니? 기가 막혀서 정말! "
지은의 엄마는 민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어 민욱을 보며 소리쳤다.
" 네가... 네가, 우리 딸을 망가뜨렸어! "
민욱은 그녀의 말에 움찔했지만,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 그게, 저는...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지은의 아버지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날카롭게 물었다.
" 네가 뭐라고 하든 중요치 않다. 우리 지은이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다만, 지은이를 그렇게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건지는 정확히 해야 하지 않겠니? "
" 병원... 지은이가 병원에 있어요...? 왜... 아니, 어느 병원이요? "
" 지금 그게 중요해? 너 때문에 내 딸이 지금 다 죽어가는데! "
울부짖는 지은의 엄마의 말에 민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한순간 숨을 멈춘 듯 멍하니 섰다가, 이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어머니가 따라 나오며 그를 잡으려고 소리쳤지만, 그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민욱은 힘들게 지은이 있는 병원을 수소문했다.
병원 복도를 달려가며 숨을 몰아 쉬던 민욱은, 지은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오를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재아는 지은의 부모와의 통화 이후로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의 병실을 찾는 길, 병원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지은! 지은아, 나와 봐! 어디 있어? "
재아는 화들짝 놀라 병실로 달려 들어가서 살며시 문을 닫았다.
병실 밖에서는 민욱이 보안 요원과 실랑이를 벌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지은아! 지은아 제발...!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얘기하자고! "
재아는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문을 닫아걸며 돌아 섰다.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은을 보고는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에, 재아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 지은 양, 지금은 저 사람을 만나선 안 돼요. 지은 양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거예요. 지금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지은 양은 병실 밖으로 절대로 나오지 말아요. "
지은은 무슨 생각인지 텅 빈 상태로 재아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재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 아뇨... 제가 갈게요. "
" 지은 양! 지금 저 사람과 마주하면 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
" 아뇨, 괜찮아요. 이건... 이건 제가 끝내야 할 일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