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이야기 #2.5

드디어 메모장에서 발굴했어요

by Nope

"너 밥 먹을 때 젓가락만 쓰는 버릇 좀 고쳐라."

아니, 기껏 급식실에 데려왔더니 고마운 줄은 모르고. 식사 예절 이야기하는 게 말이 돼? 밥이야 대충 먹으면 그만이지 귀찮게 왜 그러는 건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어 콩자반을 한가득 펐다. 순식간에 걔 식판에 있던 흰밥이 건강에 좋은 검은콩밥으로 변했다. 역시 밥투정 대장에게 가장 효과적인 건 충격요법.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노미래 너 뭐하는 거야?"
"응? 콩은 단백질이 많이 들어서 두뇌 회전에 좋댔어. 전교 1등 타이틀 날리고 싶은 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 두유만 먹는다고. 우리 부모님도 너처럼 하진 않아!"
"미안. 난 네 부모님이 아니라서."

역시나 걔 얼굴이 시뻘개졌다. 좋아. 저번에 날 만두 같다고 부른 걸 복수할 수 있겠어. 의기양양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의외네. 모범생 강석훈이 애처럼 밥투정을 하다니."
"그거랑 그거랑 뭔 상관인데."
"아주 많이 상관있지. 나중에 상견례할 때 '저 콩 못 먹습니다' 하면 분위기가 다 깨질 거 아냐."
"너무 먼 일 아냐…? 그건."
"알 게 뭐야, 그런 거."

기가 찬다는 듯 강석훈이 입을 다물었다. 잠깐만. 나 설마 방금 걔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거야…? 약속이라도 한 듯 항상 '걔'라고만 불렀는데! 안 되지, 안 돼. 강석훈은 이름도 떠올리기 싫은 걔라고. 정신 차려, 노미래!

휴. 다행이다. 걔는 식판에 올라간 콩을 건져내느라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검은콩이야 국에 말아서 꿀떡 삼키면 그만인데, 왜들 그리 난리인지. 전교 1등 강석훈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잖아.

…아. 또 '강석훈'이라고 불렀다. 오늘따라 왜 이런담. 정신 차려 나. 걔는 어디까지나 날 놀려대는 짜증나는 애라고. 꾀병 걸렸을 때 전복죽 사오고, 만두가 덜 익었을 때 데워주고, 가끔 매점 빵과 핫팩을 사다가 바친….

으.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계속 받고만 살았잖아. 나, 노미래. 빚도 안 갚을 정도로 양심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나저나 노미래, 곧 기말고사야."
"그게 뭐가? 어차피 나 이번에도 한 줄로 찍고 잘 건데."

카당.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걔 얼굴이 차갑게 굳더니… 칼바람보다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거 어떡해야 해.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입을 열려고 할 때…!
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예의 '잔소리 모드'를 시작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공부를 하면 살아가면서 얻는 기회가 많아진다, 공부를 하면 '나'를 바꿀 수 있다… 아, 네네. 다 알겠다고요.

"잘 알겠어, 강석훈. 그래서…"
"따라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응?"
"넌 공부 좋아해?"
"그럴 리가 있겠냐?"

나도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야, 공부를 하면 내 미래가 바뀐다잖아. 얼핏 내 이름을 들은 것 같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 '미래'가 설마 '나의 노미래'는 아니겠지.

으…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이다. 설마 강석훈 입에서 그런 소리가 튀어나오겠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미래. 방금 나한테 한숨 쉰 거 아니지?"
"어? 아냐."

솔직히 공부가 중요하다고 잔소리하는 사람이 공부를 싫어한다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아무튼 미래 너, 머리 있잖아."
"그렇지."
"말하고 생각할 수 있잖아."
"그것도 맞지."
"그렇다면 공부 시작해봐. 100점 맞으라는 뜻이 아냐. 그냥 아는 문제라도 좀 풀어보라고."

할 말이 없어서 걔 식판만 가만히 쳐다보았다. 콩자반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역시 강석훈. 솜씨 하나는 기막힌다니까….

시선이라도 느껴진 걸까. 숟가락으로 콩을 모아 국그릇에 떠넣던 걔가 무슨 영문이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왜. 검은콩 피라미드 처음 봐?"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무튼 난 밥 다 먹었다. 도서관 갈 거니까 따라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안 가면 어쩔 건데?"
"안 가면?"

순간 강석훈이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눈빛에 소름이 끼쳤다. 아니, 얘 오늘따라 왜 이래?

"그러면… 끝나고 독서실 가는 거지."
"학교 앞 스터디카페… 거기?"
"응. 스카."
"언제는 카페 가자며!"
"스카도 이름에 '카페' 들어가니까 아무튼 카페야. 그러길래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아. 황금 같은 내 방과 후. 강석훈이랑 다정하게 스터디카페에서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며 보내게 생겼다니. 뭐, 상대가 걔라면 적어도 나쁘지 않…긴 개뿔. 내 앞날이 참담하다. 교과서 같은 건 아예 펼쳐본 적도 없는데.

"너 교과서는 들고 다니지?"
"응? 있긴 있지. 아주 깔끔할 거야."

또 다시 이마를 짚는 걔. 으아아악… 오늘따라 강석훈의 페이스에 계속 휘말리는 느낌이다. 대체 왜 그러지?
그리고 난 왜 연신… 걔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는 거야?
머리가 김이라도 맞은 듯 뿌옇게 흐려졌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아무튼 난 말했다. 식판이랑 수저 줘."
"응?"

자연스럽게 내 식판을 자기 식판 위에 얹은 걔가 저만치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나랑 발걸음을 맞출 생각도 없다는 듯.

"야… 강석훈!"
"왜!"
"같이 가!"
"아, 공부하러 같이 간다고?"
"응… 이겠냐? 절대 안 가!"
"그래그래. 끝나고 마라탕 사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맵기 2단계. 소고기 추가. 꼬치 많이."
"그건 가게 가서 얘기해."

그렇다. 이건 오로지 다 마라탕 때문이다. 천하의 노미래는 공부하라는 말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앞으로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고.

저만치서 강석훈이 고개를 돌리며 웃는다. 벌써 기분이 풀렸나 보다. 단순하기는. 얼른 오라는 듯 손짓하는 걔의 손목을 움켜쥐고 급식실을 빠져나간다.

다음 목적지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도서실이겠지. 뭐 어때. 강석훈이 책 더미에 파묻혀 있을 때 엎어져 자면 그만이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노미래.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알겠다고!"

강석훈이 내 손목을 더 꽉 잡는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3화물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