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총 #3

이거 4까지 가겠는데요

by Nope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다.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재밌는 법이라고.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참 앞뒤가 안 맞는 소리였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데 재미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당장 내 신세를 봐라. 부루마불에 져서 내뺐다는 이유만으로 붙들려서 삿대질을 받고 있다. 그것도 자그마치 양반다리가 저려올 때까지. 차라리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며 만들어낸 풍경을 바라보는 게 더 재밌을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다. 창틀에서 미처 털어내지 못한 먼지가 공중을 부유하는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신비로웠다. 네가 떠드는 소리는 그 뒤로 아련하게 깔린 배경음일 뿐. 해독할 수 있는 단어라고는 워터파크, 소프트콘, 보드게임, 지갑, 언덕 정도였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너 때문”이라는 말이 악센트가 되었다는 걸 빼면, 아주 평화롭기 짝이 없는 연주였다.

그래, 이제야 알 것 같다. ‘인생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기에 재미있는 법’이라는 말이 왜 만들어진 건지. 바로 너처럼 날뛰는 사람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서였다. 믿지도 않는 말을 남에게 한다는 게 이중잣대 같다고?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원래 모순적인 법이니까. 그 당연한 진리를 이제 와서야 깨달은 네가 순진하기 짝이 없었을 뿐….

“뭐라고 쫑알대는 거야, 기분 나쁘게!”
“쫑알대는 건 네 쪽이겠지. 이건 중얼댄다고 부르는 거란다.”
“지금 국어 시간인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물놀이도 못 해, 밥도 못 먹어. 심지어 에어컨도 안 틀고 부루마불부터 했잖아!”

실컷 떠들어 놓고 갑자기 웬 에어컨 타령이야. 안 그래도…. 맞다. 내가 에어컨 틀고 쉬자고 해 놓고 까먹고 있었네. 말했잖는가. 난 내 눈앞에 있는 누구누구와 달리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거실 서랍을 뒤져서 에어컨 리모컨을 꺼냈다. 다행히 배터리가 충분했다. 띠리링. 운전 버튼을 누르니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동생이 에어컨 필터를 청소해 놨기를 빌어야지. 뭐 별 일 있겠는가? 에어컨 바람 덕분인지, 쉴새없이 들려오던 배경음이 멈추었다. 간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물론 동생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에어컨에서 웬 젖은 양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양팔을 벌리고 찬바람을 받던 네 쪽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흘러나왔다. 상가에 매달린 에어컨 실외기 아래를 지나가다가 냉각수를 얻어맞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 나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겠지. 설마 집까지 데려와서 에어컨을 틀어 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겠어? 하지만 한가하게 이런 생각이나 할 시간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분명 아까처럼 말로 얻어맞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른 걸로….

“늦었어.”

눈앞에서 화려하게 유성우가 떨어졌다.
여름에도 집, 겨울에도 집만 고집하던 나, 결국 여기서 잠들다.
집돌이계의 거성은 그렇게 초신성이 되어 사라졌다.

*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가스와 먼지만이 남는다.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거실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오렌지색 빛줄기 사이로 티끌이 떠다녔다. 인기척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말도 없이 사라질 애가 아닌데.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휴대폰을 주워 들고 옆면의 버튼을 눌렀다. ‘받지 마’에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 10통. 그리고 메신저 알림 20개. 보나마나 뻔한 내용이겠지. 언제 일어냐냐, 뭐 먹고 싶냐 같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니나다를까 통증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를 부여잡고 거울을 향해 걸어가니, 역시나.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거대한 혹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뭔가 새빨간 게 올라와 있었다. 이거 꽤 오래 가겠는데. 우리 집 구급상자는 찬장 맨 아래 칸에 있다. 요리를 하겠다고 매번 설치다가 다치는 누구누구 때문이었다. 이마가 벌겋게 부은 고(故) 집돌이 말이다. 물론 부모님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구급상자를 왜 하필이면 찬장에 넣어 두냐고. 하지만 동생이 ‘오빠란 자식이 내 방까지 찾아와 손이 베였다고 징징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에, 상자는 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아야!

대체 누가 찬장 문을 열고 나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미 맞은 데를 한번 더 맞으라는 거냐고! 나도 안다. 여기서 ‘누가’ 그랬는지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배고프다고 남의 집 찬장을 멋대로 뒤질 사람은 걔밖에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연고나 바르자. 어차피 걔가 제풀에 지쳐서 집으로 돌아갔다면 나도 좋고 걔도 좋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니까. 자, 봐봐. 저 현관문이 열릴 리가 없지.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아는 건 나뿐-

도어락 돌아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내 생일이 비밀번호인 건 어떻게 알고!

“갔다 왔어.”
하도 들어서 지긋지긋한 목소리.

“전화 안 받길래 내 맘대로 사 왔다?”
이 자리에서 단언한다. 이번 여름은 절대로 평화롭게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내 지갑을 걸고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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