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완성할 글 2
영화나 드라마에서 하도 우려먹던 말을 떠올렸다.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어쩌고 저쩌고.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았다. 있을 때 잘할 것이지, 왜 다 지나고 난 뒤에야 후회하는가. 그런데 야속하기도 하지.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당장이라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졌다.
서기 2108년 8월 2일.
미래의 내가 지구를 멸망시켰다는 날.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던 사람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
“계세요?”
정중한 노크로 시작된 부름은 점차 초인종을 연속으로 눌러대는 소리로 바뀌었다. 딩동, 딩동, 띵-동. 길이도 높이도 달랐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소리에 매가리가 없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우리 집 초인종은 지나가는 사람이 누르지 않고는 못 배기게 생겼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콘크리트 벽에 튀어나온 빨간 버튼이라니, 너무 수상해 보이지 않는가. 혹자는 그걸 ‘누르면 100억 주는 버튼’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버튼 같은 건 열심히 누르면 소리에 맥이 빠지기 마련이다. 경음기와 같은 원리다. 어쨌거나, 나는 여느 때처럼 재미 삼아 초인종을 눌러대는 사람이 나타난 줄 알았다. 마침 나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일어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무시가 상책인 법이니까.
이윽고 초인종 소리가 멈췄다. 문 밖 사람이 질리기라도 한 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담요를 집어 덮으려던 때. 현관문이 미친 듯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귀를 틀어막았다. 다른 건 몰라도 난 청각이 굉장히 예민하단 말이다. 이러다가 문 부서지겠다. 저번에 폭도들이 문을 아주 박살 내놓는 바람에 최대한 튼튼한 걸로 다시 달았는데. 덕분에 생활비가 반이나 날아갔다. 설마 이번에도 문이 가루가 된다면? 아냐. 그럴 리가 있겠어? 나쁜 상상은 항상 현실이 되는 법이라고. 이 사람도 제풀에 지쳐서 돌아가겠지. 괜찮을 거야.
그때였다. 거대한 폭음이 고막을 강타한 것은.
그다음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 않는다.
날카로운 이명이 뇌를 관통했다. 고개를 저어 소리를 쫓아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매운 연기가 계속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짭짤한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틈새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십니까?”
아니, 날선 목소리였다.
“그쪽 발명품 때문에 지구가 방사능 동산이 되었단 말입니다. 아무리 정부에서 의뢰받았다고 한들, 대륙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는 무기를 순순히 만들어 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잠깐만. 이 남자, 지금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이곳에 특이한 물건이 많다고 한들, 미사일 발사용 스위치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그런 것은 만들 줄도 모른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깨먹는 소리란 말인가!
“1분 전까지만 해도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증발하는 광경을 직접 보신 적 있습니까? 없으면 말을 마십시오! 나는….”
방금 전까지 찢어지는 듯했던 목소리에 습기가 맺히더니 사그라들었다. 연기 때문에 눈앞이 흐릿했지만 머릿속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깨를 수그리고 울먹이는 그 사람을. 이걸 어떡해야 해.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우기면서 눈물을 흘리는 상황이잖아. 위로해야 해, 말아야 해?
아무튼 입을 다물고 있는 작전도 한계에 봉착했겠다. 간신히 입을 열자 벌어진 틈새로 연기가 스며들었다.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목을 가다듬고 간신히 꺼낸 문장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제가 그 일을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요? 아주 많죠! 이걸 보고도 발뺌하실 생각입니까?”
뭔가가 연기를 가르고 날아와 내 발 앞에 떨어졌다. 칠이 벗겨진 USB였다. 삼류 소설에서 많이 본 레퍼토리다. 보통 이런 메모리 장치에는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사실이나 폭로해서는 안 될 비밀 같은 게 들어 있다. 말 그대로 판도라의 상자. 그런데 어쩐다. 내 최신형 컴퓨터는 USB 2.0 따윈 지원하지 않는데.
“죄송한데 이거, 볼 방법이 없겠는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쪽이 가져온 저장 장치가 너무 구닥다리라서 열 수조차 없거든요.”
“구닥다리라고요? 가장 안정적인 기술이라서 활용한 건데요…?”
좋아. 저렇게 말끝을 흐리는 모습.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이대로라면 저 인간도 한 수 접게 할 수 있겠어. 이제 현관문 수리비만 받아내고 쫓아내기만 하면….
최후의 발악인가. 연기가 걷힌 허공에 웬 생생한 형체가 둥둥 떠올랐다. 또 흔해빠진 홀로그램이냐고. 이런 거, 죄다 눈속임일 뿐이다. 저기서 열심히 나사를 조이고 있는 게 나일 리가 없단 말이다. 그 순간 고개를 든 형체와 눈이 마주쳤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뭘 잘못 먹은 듯한 초록색이지만 어디서 많이 본 얼굴. 목소리를 들은 순간 모든 걸 눈치챘다.
“그쪽 맞지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시간 관리국에서 파견된…”
“알아요. 다 안다고요. 절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그거죠?”
이런 장면, 영화에서 엄청나게 많이 봤다. 그러니 안 봐도 비디오잖아. 하지만 놀랍게도 남자는 수갑 같은 걸 채우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난장판이 된 집 밖으로 끌고 나갔다. 편히 쉬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골목에는 엘리베이터처럼 생긴 괴상한 기계장치가 서 있었다. 딱 봐도 정체를 알겠다. 남자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타임머신이잖아요. ‘그걸 어떻게’ 같은 뻔한 대사는 집어치우시죠.”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맞습니다. 이렇게 된 김에 저 고철덩어리 좀 고쳐 주십시오. 원래 당신이 태어나던 연도로 가서 존재를 없앴어야 했는데… 기계가 오작동하는 바람에 이 시대로 와 버린 거 있죠.”
잠깐만. 그런 중요한 사실을 술술 분다고? 이 양반, 잘리려고 작정한 건가? 그 시간 관리국이라는 곳이 얼마나 인력을 갈아넣길래 그러는 건지….
“부탁입니다. 네? 대신에 돈은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그쪽의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편하게 여생을 즐길 수 있도록…”
“아까부터 제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요, 그쪽이야말로 불청객 아닌가요? ”
남자의 입술이 그 자리에서 딱 달라붙었다. 좋아. 한 방 먹였어. 적어도 자존심 싸움에서는 승리했다. 난 그깟 돈에 회유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얄팍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가 내민 백지수표를 본 순간, 모든 다짐이 깨졌다.
“제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더 남았죠?”
“그쪽이 이 기계를 얼마나 빨리 고치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러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겠네. 일부러 고장내는 방법도…
“보수는 타임머신이 다 수리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먹힐 리가 없지.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래. 어차피 사람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기 마련인 거, 조금 일찍 떠난다고 달라지지는 않을 거다. 안 그래도 매일 방에 처박혀서 뒹굴거리기도 지겨운 참이었다.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답을 들은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 된 건가. 세상에 남긴 흔적이 너무 많으니, 지우려면 또 한참 걸리겠네. 엉망진창이 된 거실로 돌아가려던 때. 남자가 웬 공구 상자를 건넸다. 당장 시작할 수 없냐는 말과 함께.
“더 늦으면 상관들에게 된통 혼날 겁니다. 자칫하다 차원의 틈으로 처박힐 수도….”
“네. 얼른 시작할게요. 됐죠?”
그제서야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그래서 시한부가 된 소감이 어떻냐고? 글쎄. 그거야 겪어 보면 알겠지. 적어도 지금은 저 괴상한 타임머신의 구조를 뜯어 봐야 하니까. 너트를 풀고 상판을 떼어내자 나타난 낯선 회로와 장치 때문에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기계라면 빠삭한 나조차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알아볼 수 있는 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니셜이 새겨진 부품뿐이었다.
'D.K.'
내 이름의 약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