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이야기 #2

여름은 해가 참 길다

by Nope

태양빛으로 달궈진 컵을 동그랗게 흔들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혀끝을 맴도는 새콤함을 잊고 싶지 않다. 사라지기 전에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다. 상큼한 액체가 입을 가득 채우더니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입안에 남은 기포가 톡톡 터진다. 찌릿하고 서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간다.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까맣게 그을린 머리카락이 바람을 일으킨다. 바로 이거야. 이런 감각, 수영장에 다이빙했을 때만 느꼈는데.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정수리까지 투명한 액체에 담가지는 기분이다. 이래서 여름이 나쁘지 않은 거라니까. 수은주가 끝을 모르고 치솟는다고? 뭐 어때. 레모네이드 하나만 있으면 버틸 수 있는데. 물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다는 전제 하에… 깜짝아!

“야. 대답 좀 해. 언제까지 음료수만 마실 건데?”
“갑자기 왜 쳐? 음료수 다 쏟을 뻔했잖아!”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고. 그래서 영화 보러 갈 거야, 말 거야?”
“영화 같은 소리하네. 학원 가야 한다며?”
“그거야 째면 되지. 오늘 문화의 날이라서 영화표 반값이란 말야.”

학원을 짼다니, 그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냐? 역시 이자람 아니랄까 봐. 지난 주까지만 해도 성적 올리겠다며 내 옆에 찰싹 붙어 다니던 애인데. 뭐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으니, 작심 일주일 정도라면 엄청난 발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걔한테는.

“나 공부해야 해. 혼자서 봐.”
“시험도 끝났는데 공부는 무슨. 그리고 너 공부 안 해도 어차피 1등할 거잖아. 그러니까 한 번만.”
“덥다. 손 치워라.”
“공포영화 혼자 보기 무섭단 말야. 다른 애들은 다 봤다니 안 볼 수도 없고. 응?”

잠깐만. 설마 공포영화라고 한 거야? 망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귀신이랑 날붙이인데. 공포영화에서는 그런 게 단골로 등장하잖는가. 상상만 해도 핏줄이 얼어붙는 것 같다. 신이시여, 제발, 이 시련에서 벗어날 힘을 주소서.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 기도 따위는 구름 위로 가 닿기는커녕 그대로 튕겨나왔다. 벽에 튀겨진 배구공처럼 완벽한 45도 각도를 그리면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다. 내가 뭐 때문에 얘 옆에 나란히 앉아서 공포영화를 보고 있어야 한담? 정 못 참겠으면 팝콘통이나 던지자. 좀 쪽팔리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알아듣겠지. 가능할 거야.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아. 눈앞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을 노려본다. 제발 시작하지 마. 영사기 고장났다고 해줘. 나 공부 좀 하게 냅둬.

스크린이 밝아진다. 영화사 로고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래. 지금 도망치면 돼. 화장실 간다고 핑계 대고. 슬쩍 몸을 일으킨다. 곧바로 손목이 붙잡힌다.

“손 떼라. 나 화장실 갈 거야.”
“먹은 것도 없는데 무슨 화장실이야?”
“몰라. 아무튼 나 급해.”
“앉기나 해. 도망치려고 그러는 거 다 알아.”

알았어. 앉으면 되잖아! 쿠션이 부드럽게 엉덩이와 등을 지탱한다. 가만 생각하면 참 푹신하단 말야.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런 데 앉으니 한결 낫다. 학교 의자도 영화관 의자 같은 걸로 교체하면 좋을 텐데 말야. 안 그래?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아진다. 스크린에 영사될 내용물은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편안하니 됐…

생전 처음 듣는 쇳소리가 터져나온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아득하게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고요한. 16세 7개월 만에 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사인은 심장마비. 모두 안녕히.

*
폭풍이 쓸고 지나간 스크린은 밤바다처럼 평온하다. 팝콘통은 엎어진 지 오래. 저 앞줄에서도 알맹이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진짜 화려하게도 굴러갔네. 일어나.”

네가 손을 뻗는다. 땀 한 방울 없이 보송보송하다. 내 손바닥은 물티슈로 문지른 것만큼이나 축축하기 짝이 없는데, 누구 아니랄까 봐 참. 빈틈을 보이는 순간 놀림거리가 될 터. 그러니 태연한 척해야 한다.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며.

“그래. 가자.”

영화관에서 빠져나오니 눈이 부시다. 저 앞에 선 시계에 따르면 지금 시각은 오후 5시이다. 5시인데도 이렇게 햇빛이 뜨겁다고? 보통 같았으면 눈을 질끈 감았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눈을 감으면 새하얀 형체가 나타날 것만 같아서. 매미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물미역 같은 머리카락이 웃어대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 자람. 쉬지도 않고 말을 걸어대는 건 여전했지만 전혀 밉지 않다. 영화 생각으로 빠져들려고 하는 두뇌를 현실로 끄집어내 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상하네, 오늘따라.

“고요한. 이제 뭐 먹을 거야?”
“하얀색이랑 빨간색은 최대한 피하고 싶어.”
“접수 완료. 딸기 빙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역시 이자람 아니랄까 봐. 자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는다. 그 웃음이…

“너 왜 웃어?”
“몰라!”
“얼씨구. 왜 화내. 그렇게 무서웠어?”
“누가 무섭대? 전혀…”
“거짓말 그만해. 너 쫄았던 거 다 알아.”

저 인정하라는 듯한 눈빛.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괜히 길바닥에 놓인 캔을 걷어찬다. 내용물이 흘러나오며 운동화 앞코를 적신다. 새로 산 건데…. 이자람이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희미하게 ‘꼴 좋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누가 차고 싶었대?

“아무튼 여름은 아주 길 거야. 기대하라고. 방학은 3주밖에 안 되지만 본전은 뽑아야지. 안 그래?”

그러면서 이자람은 인도 위를 뛰어간다. 평소처럼 빨간 보도블럭만 밟으면서. 오렌지색 햇살에 달구어진 머리카락이 찰랑인다. 보기에 나쁘지 않다.

“뭐해? 빨리 안 오고!”

저러다가 넘어지지는 않을까 의문이다. 자람을 따라 달음박질한다. 혹시라도 무릎이 꺾인다면 붙잡아 줄 작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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