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조금만 더》를 읽고
난 미션스쿨을 다녔다.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매주 채플과 예배가 있었고, 매달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며 세례를 권유받았다. 그렇다고 그 학교가 성스럽고 깨끗했느냐고 묻는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
중학교는 사학 비리로 시끄러웠고, 몇몇 교사는 자습서에 밑줄 그은 문장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읽으며 수업했다. 고등학교에서는 교회에서 장로라는 선생님이 여학생들의 귓불을 만지거나 등을 쓰다듬는 식의 성추행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다. 동아리 선배들의 얼차려는 일상이었고, 수학 문제를 못 풀었다는 이유로 매를 맞는 것도 억울하지만 낯설지는 않던, 야만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나는 세례 신청을 받던 반장에게 “도교를 믿는 사회주의자가 되자”고 말했다. 마침 근현대사를 배우고 있던 시기였다. 왜 그러냐고 묻는 반장에게 친구가 말했다.
“혁명이 필요해서.”
말도 안 되고 억울한 학창 시절을 견디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판타지였다. 그래서 우리만의 유토피아를 꿈꿨다. 도교를 따르기로 한 우리는 무협 소설을 읽으며 도력을 키우자고 했고, 사회주의자답게 모든 일을 비판적으로 따지며 평등과 공정을 외쳤다. 그렇게 상상 속에서 우리는 유토피아를 완성하기 위해 몇 번의 혁명을 치뤘다. 그러다가 마침내 현실에서 일이 터졌다.
그때 우리는 수능과 본고사라는 두 번의 입시를 해야 하는 힘든 고3을 견뎌내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새로 부임한 K 수학 선생님이었다. K 선생님이 온 뒤, 학교에는 성적순 특별반이 생겼다. 상위권 학생들만 따로 모아 특별 수업을 했다. 삼면을 칠판으로 만든 교실에서, 학생들을 1번부터 불러내 칠판에 문제를 풀게 했고, 시간 내에 풀지 못하면 복도에 줄지어 세워 놓고 순서대로 뺨을 때렸다.
그러던 중, K 선생님이 상위권 반에서 1등인 학생과 그 동생에게 과외까지 해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우리 학년 전체가 K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 뒤돌아 앉아 수업을 거부했다. 선생님은 몇몇 학생을 끌어당기며 다시 돌리려 했지만, 누구도 돌아서지 않았다. 두 번째 수업 시간에는 전원이 교실을 비웠다.
혁명은 K 선생님이 학교에 경위서를 내면서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고3이라는 상황과 다른 선생님들의 꾸짖음도 한몫했다. 상황이 종료되고 난 후에 그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수업에 들어왔고 그 모습에 우리는 승리했다 생각했지만, 그는 특별반 학생들에게만 사과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뺨을 때리는 행위만 멈췄을 뿐, 그 외에는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원했던 진심 어린 사과는 결국 판타지였던 걸까?
대학에 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얼차려는 있었고 여학생을 상대로 한 성차별적인 발언과 노골적인 성적 농담은 계속됐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뀌지 않는 현실에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서 위로받았다. 그 속에서는 정의가 승리했다. 정의로운 검사가 비리 권력과 썩어빠진 언론을 처단했고, 살해당한 주인공이 회귀해서 악을 응징했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이 재판에서 이기고 사람들은 단결해서 정의를 실현한다. 작가들은 현실을 보여주고 판타지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이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놓지 않게 한다. 어쩌면 할 수도 있다는, 어쩌면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게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데 한참 지나고 보니 우리는 조금씩 바꿔왔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의 '혁명'은 최소한 뺨을 때리는 건 멈추게 했다. 당연하다 여겼던 성적 접촉이나 농담, 아이들을 매로 다스리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 누군가는 문제를 제기했고 지속해서 이야기해오면서 바꾼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20년도 훨씬 넘어 졸업생들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아직 K 선생님은 퇴임 전이었고, 일부는 그 선생님때문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을 준비하던 대표가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K 선생님이 사과하신대.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야 잘못을 알았다고, 우리 기수한테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고 하시더라.”
동화 《조금만, 조금만 더》를 보면, 소년 윌리는 농장을 지키기 위해 전 재산 50달러를 걸고 개썰매 경주에 나선다. 처음에는 말리던 이웃들이 점차 윌리를 응원하게 되고, 결국 결승선 3미터 앞에서 경쟁자의 도움으로 우승한다. 현실에서도 일어날 법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판타지다. 열 살 남짓한 소년이 수년간 우승한 팀을 이긴다는 것도 그렇고, 주위 어른들이 모두 따뜻하게 응원해주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판타지는 희망과 위로를 준다.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현실을 위해 방법을 찾다 보면 결국 해결된다는 희망 말이다. 동화를 읽는 아이들에게 이런 희망은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처한 상황이 어둡고 끝이 안 보이는 터널처럼 느껴질수록, 그 끝에는 출구가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판타지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어쩌면 20년이 지나 받은 그 사과처럼, 오래도록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유토피아에 닿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생각 자체도 어쩌면 또 하나의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