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동시에 책 읽는 양이 많아지면서 책의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주인공이 무슨 말을 했더라', '인물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더라'부터 시작해서, '아, 그 문장 좋았는데 못 찾겠다.' 등등 책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서 내용들이 뒤죽박죽 되어버렸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독서노트'였다.
처음에는 독서노트를 쓰기 위해서 북클럽에서 제공된 독서 다이어리를 사용해보았다. 쓸 공간은 작았고, 채워 넣어야 할 항목은 너무 많았다. 완전히 펴지지도 않는 독서노트에 깨알같이 뭔가를 쓰려니 손가락 마디까지 쑤시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손글씨로 기록하는 독서노트는 나와 맞지 않았다.
이번에는 앱스토어에 접속해서 '독서'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았다. 코로나 이후로 독서 인구가 늘어서인지 각종 독서기록 어플리케이션이 즐비했다. 그중에서 몇 개를 골라 설치해보고 가장 나에게 맞는 어플을 사용하게 되었다.
'공감과 생각'
이름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그 흔한 광고도 없었다. 일종의 독서 SNS였는데 메뉴가 복잡하지도 않고 직관적으로 사용하기도 편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사진으로 찍으면 바로 글자로 바뀌어 저장이 되었고, 저장한 기록은 인스타그램처럼 타인과 공유하며 나눌 수 있었다. 1년 정도 자동 로그인을 설정해놓고 책을 읽으면서 사진을 찍어 문장을 저장하고 공유했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앱에서 '기록하기'를 누르면 '인터넷에 연결할 수 없습니다'라는 오류 메시지만 뜨고 있었다. 일시적인 네트워크 오류겠다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며칠 전에 다시 문제를 깨닫고는 어플을 재실행시켜볼 요량으로 사용한 이후로 처음으로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재로그인을 실행하려는데 다시 인터넷 연결 오류 메시지가 떴다.
더 이상 서버에 로그인할 수 없다.
'어, 뭔가 잘못되었다.'
서버에 연결을 시도할 때마다 인터넷 연결 오류가 나고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난 어플을 지우고 다시 앱스토어로 갔다. 그리고 '공감과 생각'을 검색했지만 다운로드가 가능한 링크는 나오지 않았다. 어플리케이션을 만든 회사가 사업을 접었거나 돈이 되지 않은 어플을 마켓에서 내려버렸거나, 어찌 되었든지 내가 일 년간 저장해둔 데이터를 다시 열어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한 기록과 문장이 사라졌다. 내가 들인 정성과 시간도 사라졌다. '젠장!'
스마트 폰이 등장하고 인터넷 사용의 주요 매체가 PC에서 휴대전화로 바뀌면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많은 웹사이트들이 서비스를 중단했다. 그로 인해 해당 사이트에 쌓아둔 자료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들이 생겼고 그들을 지칭하는 '디지털 수몰민'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그리고 나는 또 디지털 수몰민이 되었다. 예전에 프리챌이 없어지고, 싸이월드가 사라져서 추억을 잃었을 때처럼......
출처 : 인터넷
최근에 싸이월드가 다시 문을 열었다.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해서 경영난을 맞이했던 싸이월드는 갑자기 문을 닫았고, 많은 사용자가 디지털 수몰민이 되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카카오 스토리가 유행하기 전까지는 꽤 많은 도토리를 소비하던 열혈 사용자였다. 비록 갑자기 문을 닫을 즈음에는 이미 싸이월드에 뜸했던 상태여서 충격은 덜했지만 간혹 들여다보던 추억 놀이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게 꽤나 섭섭했었다. 그래도 다시 문을 열었다니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꺼내 볼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요즘 많은 소프트웨어가 클라우드 기반으로 바뀌고 있다. 일정의 이용료를 내고 서버에 연결하여 앱을 사용해서 작업을 하고 그대로 서버에 저장하거나 혹은 내 PC에 다운로드하여서 저장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어디에서나 연속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고가의 소프트웨어도 필요한 기간만큼 직접 구매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브런치의 글쓰기도 어디서 어떤 경로로든 접속해서 이어 글쓰기가 가능하고 개인 PC에서 작업하던 엑셀 파일을 휴대전화로 밖에서 수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훨씬 자유로워지고 편리해진 것 같지만 그만큼 나를 얽어매는 것들이 더 늘어났다. 휴대전화에서는 자동으로 사진과 작업하던 문서, 내가 사용하던 앱들, 메시지들을 서버로 보관해서 관리해준다. 단말기를 바꾸어도 아이디만 알면 다 공유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 독서기록 앱처럼 아무런 경고 없이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SW회사의 실수로 업데이트 도중에 데이터가 손실되는 등의 이유로 잃어버릴게 더 많아졌다. 휴대전화의 os를 업데이트하면서 오류가 나서 그동안 찍어둔 사진이 다 사라지지 않을지, 혹은 DDos 공격 같은 문제로 브런치의 서버에 그간 써둔 글들이 다 사라지지 않을지 걱정될 때도 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디지털화되고 있는 요즘,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것을 고민해본다. 온라인 상에 저장해둔 기록을 노트나 다이어리에도 기록해둔다면 이번에 당한 경우만큼 당혹스럽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앱스토어에서 다른 독서기록 앱을 다운로드하였다. 이번에는 유료 앱을 선택했다. '유료로 신청했으니 혹시나 서비스가 중단되어도 미리 공지는 해주겠지.'라는 희망도 가져본다. 그리고 별도로 커피 전문점에서 받은 다이어리 하나를 독서기록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책을 사진 찍어서 문장을 저장하던 것은 멈췄다. 책에 스티커로 표시를 하고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시한 문장만 한번 더 읽어보기로 했다. 앱에서는 읽고 있는 책과 진도를, 다 읽고 나서는 독서노트에 기록한다. 비록 지독한 악필이라서 보기엔 아름답지 않아도 내가 버리지 않는 한 내 옆에 계속 남아 있을 기록이다.
어제 한 권의 책을 다 읽었다. 책 옆에는 표시해둔 스티커가 가득하다. 이제 독서 다이어리를 펼친다. 곧 휘발될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서.
* 디지털 수몰민 :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서비스가 종료되면서 해당 사이트에 쌓아 둔 개인자료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