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to the police. 헤이 바바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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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여름이었다.

체육복 다음으로 좋아하던 여름 하복을 입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중, 여고가 함께 붙어 있는 울타리가 같은 캠퍼스에서 소녀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토요일 4교시를 끝으로 모두가 하교하는 시간, 나는 같은 방향 친구들과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제일 좋고, 교실보다는 바깥세상에 더 관심이 많던 시절.

집에 가는 15분, 20분 안되는 시간조차 깔깔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신나게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던 길에,

50m도 안되는 거리에서 본인 몸보다 훨씬 큰 책가방을 멘 중학생 소녀가 뭘 봤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저앉는다.

귀신인가. 대낮에 출몰하는 귀신이면 얼마나 무서운 놈일까?

본능적으로 뛰어가 아이를 일으켜 교복과 가방을 털어주며 무슨 일이냐 물었다.

대답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아이를 달래고는 떨어진 아이 시선을 따라가보니, 이건 뭐야.

'바바리맨' 이다.

매체에서 봤던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바바리맨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 바바리맨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념하는 빨간 티를 입고, 검은색 벙거지 모자를 한껏 눌러쓴 남자.

인상착의와 함께 무언갈 열심히 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그려지는 걸 보면 나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나 보다.

어린 소녀에게 '괜찮아. 괜찮아 조심해서 집으로 가.' 라며 어르고 달래듯 말해주고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아저씨, 남자, 바바리맨, 낯선 남자, 이상한 사람, 또XX, 흠. 부를 수 있는 호칭이 다양하군.


- 뭐하는거에요!!!!!

- 지금 안 가면 신고할 거예요!!!

- 신고합니다 진짜!!!!!!!


뭐 이리 정중한 외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내 외침에도 바바리맨은 요지부동이다.

세차게 소리를 지른 뒤 옆을 보니 어느새 몰려든 친구들이 함께 화를 내고 있었다.

겁 없는 여고생들이여.

그러던 중, 가까운 거리라며, 다가와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냐고 잔뜩 겁을 먹은 친구 한 명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불쾌한 감정은 사그라들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의협심이 불타올랐다.

그리곤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들어 112를 눌렀다.

열여덟 내 인생 첫 신고 전화였다.

원더우먼이나 영웅이 장래희망은 아니었지만 놀란 그 소녀를 위해 무언갈해야만 했었을까.

아니면 덩달아 충격받은 나를 위해서일까.

지나치는 다른 학생들에게 무언갈 보여주고 싶었을까.

모르겠다.


격앙된 목소리를 최대한 가라앉히며 상황 설명을 한 나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 아저씨, 이제 경찰 아저씨가 와서 잡아갈꺼에요!!!!!!!!

그리곤 주변 친구들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아직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이상한 아저씨에게는 곧 경찰이 출동할 테고,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다 생각했다.

내 신고 전화가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할머니에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상황 설명을 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위험하게 왜 그러냐면서, 그럴 땐 그냥 지나가라고, 엮여서 좋을 게 하나 없다고 걱정하셨다.

괜한 일을 한 걸까.

근데 사실 잘못된 걸 신고하고 제보하는 게 맞는 일이잖아.

지나치는 게 맞는 걸까.

그렇게 이중적인 생각이 오가고 있을 때, 할머니는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을 입에 물려주셨고

크게 한 입 베어 문 수박 과즙이 입안에 촥 퍼질 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경찰이었다.

내가 설명해준 장소에 와서 한 남자를 잡았는데 본인은 끝까지 그런 일이 없다면서, 우긴다는 것이다.

나는 황당했지만 최대한 차분히 말했다.

- 혹시 그 아저씨 월드컵 티셔츠에 검은색 벙거지 모자 쓰고 있지 않아요?

정확히 기억하는 인상착의를 말했을 때 수화기 넘어 경찰은 내 말이 맞다 했다.

나에게 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 못 했던 열여덟 나는, 계속된 통화가 불편해 전화를 끊으려 했다.


- 아 잠시만요 학생.

- 네?

- 혹시 확인이 필요해서 그런데, 같이 지구대로 가줄 수 있을까?

- 네?


What? 내가? 참고인으로 지구대를? 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지구대였다.

계속된 설득과 함께 10분이면 된다 했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똑같은 질문들이 계속되자 점점 불쾌하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미성년자인 나를 부모의 동의와 연락을 구하지 않고 지구대에 데리고 왔다는 점, 잘못은 내가 아니라 저 아저씨라는 점,

뭔지 모를 압박감 있는 분위기가 나를 점점 몰아세우고 있었다.


길었던 토요일 오후였다.

경찰의 태도에 화가 난 부모님께 나는 최대한 차분히 설명을 하고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전적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른들의 잘못이라며 다독여 주는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더 이상 걱정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월요일, 교내 방송에서 나를 부르는 학생부장 선생님 목소리가 들렸다.

찾아간 상담실에는 학생 부장 선생님과 기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바바리맨을 신고하고, 지구대에 다녀온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주 신기했고 동시에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친구들을 한데 모아 놓고 아직 에피소드의 첫 운도 띄우지 못했는데, 뭐 이리 속전속결일까.

그날에 대해 혹시 설명해줄 수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는 말했다.

- 설명은 해드릴 순 있는데 어떻게 아신 거예요? 궁금해서요.

그날, 내 개인 정보와 함께, 관련 조서가 이렇게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웠지만 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캠퍼스 주변으로 범죄 예방을 위한 cctv가 설치되었고 지역 기사에도 그날의 이야기가 실렸다.

한동안 바바리맨과 관련된 이야기가 쉽게 오르고 내렸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가 학교를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바바리맨을 마주친 적이 없다.

바바리맨 커뮤니티에서 내가 꽤 큰 파장을 일으킨 걸까.

아니면 나만 못 보는 걸까.

그 여린 중학생 소녀는 이 사실을 알까.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바바리맨 사건이 잊혀질 때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앞으론 나서지 말아야지'

'굳이 내가 왜'

바바리맨보다 나에겐 신고했던 날, 지구대의 일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불쾌하고 못마땅했던 날로 기억하니까.


하지만 그 뒤로 나는, 누군가에게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몇 번 더 마주쳤다.

누군가 폭력을 당하고 있는 순간,

누군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순간,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들을 보고도 쉽게 나설 수 없는, 혹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엮이곤 싶지 않지만, 모른척할 순 없었던 나는 그럴 때면 공중전화박스를 찾았고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질 때쯤엔 자리를 피해 복잡한 상황을 피했다.

그리고 공중전화박스를 찾기가 어려운 요즘,

불합리한 폭력을 계속해서 당하고 있던 한 남학생을 위해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가까운 지구대로 직접.


사실 어려움에 처해있는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첫 단계가 신고일 때가 있다.

앞서 말한 그 누군가가 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

위급한 상황에 다들 내 일이 아니라고 지나친다면?

아무도 나서주지 않는다면?

물론 이 세상에는 의롭고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고 과정에서 혹은 언론 매체에서 만나는 피해자와 피의자, 안타까운 경찰 대응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생각한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안 하지.'

돌아오는 피드백이 내 상식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겪은 후엔 '그래, 앞으론 내 일이 아니면 그냥 가자.' 라고 마음먹지만 또 그러질 못하는 나다.


남학생을 도와주고 돌아오던 날, 걱정스러워 하는 동생에게 말했다.

위험하지 않게 내가 도울 수 있는 선에서 돕는 거야.

네가, 혹은 내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몰라.

결국 신고 정신이 투철한 언니를 뒀다며 웃는 동생을 보며 함께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불편하고 찜찜하고 맘에 걸리는 게 있지만, 그럼에도 도와야 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함이 맞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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