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김은숙 작가님의 모교인 문예창작과에 합격한 나는 부푸는 가슴을 안고, 김칫국 드링킹을 시작했다. '오, 드디어 내가 김은숙 작가님의 발자취를 따르는구나!' 그래, 인생 뭐 있나. 합격이라는 영광을 누리겠노라!' 하지만, 그때 당시 입학금과 등록금을 합하면 오백만 원이라는 거금이 필요했다.
그리고, 전업주부인 나에게 그 돈은 너무나도 큰돈이었고, 그 돈을 지불한다는 마음을 먹는다는 자체가 스스로 참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전업주부에게 '돈'이란 '가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오롯이 나를 위한 지출이라니! 그것도 오백만 원을?!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먼저 읽은 건 남편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지갑을 기꺼이 열어주었다. 제2의 꿈을 지지한다는 남편의 선물이기도 했고, 나의 다짐이기도 했던 그때의 거금 지출은 나에게 김은숙 작가님과 같은 출신이라는 학생증 한 장을 안겨주게 되는데. (이 학생증은 평생 나에게 소중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딱 설렜다. 하지만, 나는 입학과 동시에 좌절에 부딪치고야 만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 어린이집에 맡길 수 없던 나는 친정엄마께 긴급히 호출을 했고, 후에 엄마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셨다.
"어떡하니 딸. 엄마가 도와주고 싶었는데, 엄마가 하는 일에서 빠질 수가 없게 됐어."
"괜찮아. 엄마. 나 진짜 괜찮아. 신경 쓰지 마요."
시어머니께는 아예 말씀도 못 드렸다. 오래전 앓으신 암병력이 있으셨던지라 몸이 좋지 않으셨고, 그런 분께 아이들을 덜컥 안기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사실, 울컥하기도 했다. 한 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는데.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럼 그렇지. 한탄을 하던 그 순간 제일 미안한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남편이었다. 나의 꿈값에 오백만 원을 기꺼이 결제해 준 남편. 아, 어떡하지? 나는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눈물도 고였던 것 같다.
"아이들, 어린이집에 맡기자. 하고 싶어 했잖아."
"아냐. 나만 생각하기에는.. 애들이 너무 어려.."
남편이 육아휴직 이야기를 꺼냈지만, 사실상 그 당시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아빠들의 육아 휴직은 곧 퇴사라는 생각이 지배적일 때였다. 무거운 침묵 뒤, 남편이 입을 열었다.
"난 그 돈 아깝지 않아. 네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지지하고 싶었거든. 휴학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생각해 보면, 다그치지 않고, 돈 아깝다고 난리도 치지 않고, 진짜 끝까지 내 손을 잡아줬던 건 남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코끝이 시큰해진다.
남편은 알까? 나 때문에 지불했던 그 돈, 내가 내 손으로 글을 써서 벌어 남편 통장에 입금해 주는 게 꿈이 된 것을. 난 그렇게 김은숙 작가님 대학교의 학생증을 지갑에 늘 꽂고 다니며, 남편과 얘기했던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은 몇 년 간 계속됐다. 육아에 더욱 전념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주길 바라면서 정성스레 아이들을 키워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야 내 꿈도 성장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 열심을 다했다. 드라마라는 세계를 선망하게 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다른 게 아니라 그 선망의 불씨가 점 점 커져버려 활활 타게 되는 지경이었다는 거다. 아이들을 키우며 억눌린 자아가 폭발이라도 한 건가. 나는 시들기는커녕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힘으로 악착같이 육아를 버텨냈다.
어서 오세요. 여의도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 인터넷을 하다가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서 드라마 작가 지망생 모집글을 보게 됐는데, 주 1회 3시간가량만 투자가 가능한 시스템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시 서울예대로 갈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드라마 작가는 대학 타이틀보다 전문적으로 그 분야를 파고드는 게 더 이득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용감하게 지원을 했다. 기분 좋은 외출에 참 설렜었다. 면접을 거쳐, 합격을 하게 되었고,(수강료를 결제할 때는 손이 덜덜 떨렸지만;) 여의도 금산 빌딩으로 입성하게 됐다.
아직도 기억한다. 나의 첫 수업일을. 국희의사당역 플랫폼조차도 그렇게 설렐 일이었을까. 수십여 명의 지망생들과 한 반에 복작복작 모여 인사를 나누고, 현직 작가셨던 강사님의 수업을 들으며 얼마나 행복했던가. 저녁 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주일에 한 번의 수업은 나에겐 포도당 수액이었고, 숙취 해소제였으며, 그 어떤 야식보다 더 맛있었다.
나는 아직도 강사님의 그 말을 잊지 못하겠다. 첫 작품의 모진 합평 시간. 가차 없이 내 첫 작품을 향해 학생들이 칼날을 휘두르는 시간이 합평 시간인지라 여유로운 척 연기하지만, 사실은 초조해서 터져버릴 것 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처참한 시간 속을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던 나에게 강사님은 말씀해 주셨다.
"박해나 씨 대본은 가독성이 좋죠? 큰 장점이에요. "
대본 가독성이 좋다고? 나의 큰 장점이라고?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물론, 그 뒤 실랄한 비판도 이어졌다.) 드라마 세계를 선망하며 오롯이 나에게 내려진 그 말은 드라마작가를 시작해도 좋아요,라는 일종의 큐사인이었다. (이현재 작가님 사랑합니다. 하트.)
무시무시한 합평을 치렀지만, 작가님의 한 마디에 나는 더욱더 열을 올리며 드라마 작가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강남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가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가리지 않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트렌드에 맞는 드라마를 써보리라는 야심이었다. 하지만, 나는 야심에 취해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 가장 중요한 기본. 기본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기본을 무시한 덕에 나는 쳇바퀴를 돌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