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 같은 공간, 같이 회의한다. 어떤 이는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뚫을 듯한 기세로 발표자를 쳐다보고, 다른 이는 눈꺼풀에 눈동자를 그려주고 싶을 만큼 뜬 눈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자세만은 책상 위에 노트와 한 손에는 펜을 '척'하니 들고 경청의 모범을 보여준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언제 차례가 올지 불안해하다가 내용을 놓쳐 황급히 귀를 기울인다. 하필 놓친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대왕 상사가 나를 콕 집어 묻는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얗게 된 뇌를 벌거벗겨 보여준다. 직속 상사가 한심한 눈길로 쓱 보면서 대변한다. 이제 내 순서가 와서 발표를 잘 마치지만 기분이 찝찝하다.
직장의 구성원을 둘러보면서 '참 다양한 사람이 한 공간에서 일하고 있구나'라고 느꼈다. 그 사람들을 유심히 보다 보니 두 그룹이 보였다. 이상한 건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하나는 뛰어난 그룹, 다른 하나는 평범한 그룹 그리고 나.
대부분 사람은 뛰어나고 싶고, 군림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일부 사람은 그 욕망에서 오는 지독한 외로움과 주변에서 오는 거짓 웃음소리 때문에 평범한 사람을 자처한다. 평범이란 모든 수준이 보통인 것을 뜻하는데, 사실 이것이 가장 어렵다. 단어를 풀어서 보면, 의미를 곱씹게 된다.
뛰어나다
남보다 월등히 훌륭하거나 앞서 있다.
평범하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
진정 평범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난 점을 알아서 혹은 찾지 못해서 조절하고, 못난 점을 더 못나지 않게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은 필요할 때, 단번에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동등하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 그저 매일 조금씩 뛰어난 사람으로 향하는 예비 실력자이다. 어쩌면 뛰어난 사람이 되고 멈추게 될 노력과 앞서 말한 부작용들 때문에 시동을 보류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엄청난 절제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연구원 시절 동안, 넘쳤던 완벽주의 욕망은 감정까지 억눌러 버렸고 나는 그게 통제라고 믿었다. 거짓된 믿음으론 뛰어난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될 수 없었다. 직장에서 많은 일을 쳐내면서 뛰어난 자처럼 증명하고 싶었지만, 그건 일 중독자의 다른 말인 일 노예가 됐을 뿐이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아 조언을 구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평범과 비슷해졌지만, 급하게 평범한 사람이 되면 오는 부작용을 모르고 있었다.
부작용은 애매함이다. 아무도 애매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다. 대부분은 뛰어나길, 일부는 평범하길 원하지만, 아무도 애매한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애매하다
1. 희미하여 분명하지 아니하다.
2. 희미하여 확실하지 못하다.
슬픈 건 내가 그 애매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 분류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뭘까?
차이점: 나와 비교해본 결과
뛰어난 상사는 자꾸 없는 일을 만들어낸다. 하나를 겨우 처리했는데, 그 하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다른 일을 더 준다. 빨리 자리로 돌아가서 일해야 하는데, 잔소리는 덤이다. 자리로 돌아갈 수가 없다. 시간을 없애면서 일을 줄일 마음이 없는 점이 나와 다르다.
평범한 동료는 상사가 던진 종이에 맞아도, 욕 샤워를 해도 앞에서는 절대 티를 내지 않는다. 가끔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그래도 바로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뱉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물론, 상사가 없는 자리에서는 욕에 '뛰어난' 사람처럼 입에 모터를 달지만, 묵묵히 현재의 자리를 지키면서 평범한 일상을 유지한다는 점이 나와 다르다.
애매한 누구는 상사의 욕을 들을 때 당황해서 표정이 변하고, 스스로 바보 같아서 화가 나며 그 감정에 사로잡혀 일의 효율까지 떨어진다. 속상한 마음을 담아 당당히 욕하고 싶지만, 눈치 보느라 욕도 시원하게 못 한다. 매번 상처만 받는다. 나와 비교했을 때, 애매한 누구와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 두 부류와 차이점이다.
공통점: 상처 먹이사슬의 보존 법칙
뛰어난 사람은 우월한 생활을 해왔기에 보통 자존감이 높다. 하지만 같은 부류 안에서 또 계급이 나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우주 뚫고 은하계 가는 놈이 있다. 사람이기에 자기보다 높은 자가 주는 압박에 상처를 받는다. 평범한 사람은 뛰어난 사람을 보면서 상처를 받는다. 상대적으로 자존감이 낮은 평범한 사람은 스스로 눌리고 마음이 야들야들해지는데, 거기에 뛰어난 사람이 속도 모르고 뱉는 말에 푹푹 찔려 미움이 줄줄 흐른다. 애매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부러워하며 상처를 받는다. 그저 많은 것을 안 바라고 평범하게만 지내고 싶은데 안 되니까 힘들어한다.
직장 생태계의 먹이 사슬이다. 고로 누가 더 아픈가 보단 자신의 입장이 가장 힘들므로 깊이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상처를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끔 보기 힘든 돌연변이를 본다.
보통 직장은 앞서 말한 부류가 서로 엉켜서 일하는데, 사막에서 눈물 한 방울 찾을 만큼 만나기 힘든 부류가 있다.
바로 '따뜻한 사람'이다. 나는 딱 한 번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말한 따뜻한 사람이란 말투의 부드러움이나, 생김새의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진짜 마음을 전하는 울림이 있는 사람이다.
사회 초년생 때는 이미 똘똘 뭉친 무리 속에서 혼자 덩그러니 일했다. 무리에게 조금이라도 나쁜 소리나 눈빛을 받는 날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자주 화장실 세 번째 칸으로 달려갔다. 어느 날, 상사가 지시 사항을 말하다가 내 붉은 눈을 봤다. 나를 데리고 단백질 사진을 찍는 조용하고 서늘한 암실로 갔다. 무서웠다. 방에 불을 켜고, 말없이 바라봤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안 그래도 터진 눈물이 주체가 안 돼서 눈을 깜박이며 형광등만 쳐다봤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누군가 걸려서 뼈도 못 추릴 정도로 혼났다는 소리가 하필 기억이 났다.
"누가 괴롭힌 거야? 말해 봐."
"뭐가 널 힘들게 하는 거야? 어?"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 내어 꺼이꺼이 울었다. 심지어 추운 방에서 거친 말투로 한 말이었지만, 걱정이 섞인 따뜻한 마음에서 진심을 느꼈다.
사회는 아프고 잔인할 때가 많지만, 구성원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내가 뛰어나거나, 평범하거나, 애매한 나쁜 사람일 수 있다. 지금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앞으로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심하면서 설사 되지 못할지라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 속한 무리의 첫 '따뜻한 사람'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