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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May 29. 2024

중요한 건 기세! 꺾여도 해보는 마음?

카드게임 <마이티>

인생에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본 경험, 얼마나 될까. '주도권'이란 말이 와닿지 않는다면, 소소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바꿔보련다. 여럿이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내가 먼저 메뉴를 제안하는 것, 다 다른 지역에서 오는 친구들을 만날 때 모일 장소를 결정하는 것, 내 방식이나 내 제안이 맞다고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하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끌어 가보는 것.

아무튼 일상에서 경험하는 주도권이라면 이런것들 아닐까. 진짜 소소한 것들만 적어놓은 것 같긴 한데 그럼에도 이렇게 적어보니, 사실 나야말로 그런 일이 없다. 아니 애초에 주도권을 가지려는 노력 자체를 많이 안 하고 살았다. 귀찮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도 나쁘지 않다는 핑계로, 실은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나는 부담을 피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특히 회사 일에 있어서 좀 더 그랬다. 늘 일은 일이요, 나는 나요, 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다 보니 목소리 큰 사람이 있으면 대체로 그 의견에 따랐고, 다만 나의 결정은 최소한의 리스크만 피하자는 쪽으로 보수적으로 흘러갔다. 의견이 다른 누군가와 설전을 벌이느라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고 싶었고, 혹여나 그렇게 설전을 벌여 쟁취한 나의 아이디어가 더 부족한 것이었을 때 감당해야 할 책임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약간의 변호를 해보자면, 아무튼 이런 성향임에도 일이 내가 납득하지 못할 정도로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은 또 못 보는 타입인지라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아이디어도 어떻게든 되게 만드는 다른 스킬이 꽤 발달해 왔다. 음, 적어놓고 보니 내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에너지를 아껴,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되게' 만드는 일에 쏟고 있었구나. (...한심하다!)


스스로 뼈때리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쨌든 그런 면에서, 우리집에서 나와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아빠가 있다. 꽤 오랫동안 사장님으로 살아오기도 하셨고, 이순이 한참 넘은 연세에도 아직까지 친구들을 당신 동네로 불러 모아 노신다. 음, 아, 집안에서의 주도권은 노코멘트로 하겠다.

아무튼 밖에서는 늘 주도권을 가지고 사는 아빠지만 집에서는 늘 외롭고 심심하시다.(!?) 그나마 내가 본가에 갔을 때가 아빠가 유일하게 집에서 신나 있는 시간 같기도 하다. 아빠와 나의 성향이나 취미가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렇다,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건 명백히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다.

그날도 어쩌다 서로 최근에 하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빠는 친구들과 늘 당구를 치거나 고스톱, 포커나 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마이티 이야기를 꺼낸다. "마이티?" 내가 알은체를 하니 아빠의 눈이 작아지며 얼굴에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가 번진다. "네가 어떻게 마이티를 아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인데. 오로지 내 전략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잖냐."


<마이티>는 다섯 명이서 하는 카드게임이다. 무조건 인원수 다섯을 맞춰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제약이지만, 그것만 해결되면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트럼프카드만으로도 할 수 있다. 다섯 명의 플레이어는 카드를 똑같은 수로 나눠 받은 뒤, 돌아가며 그 판의 '주공'이 되기 위한 배팅을 던진다. '주공'이란 짐작 가는 대로 그 판의 '주인공' 같은 거다. 주공이 된다는 건 내가 그 판을 이기겠다는 선언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판을 꾸려갈 수 있는 권력이 생겼음을 뜻한다. 주공은 해당 판에서 가장 강력한 카드의 무늬를 정할 수 있고, 자신을 도와 그 판을 주공의 승리로 만들기 위한 프렌드도 정할 수 있다.

주공도, 프렌드도 되지 못한 3명은 힘을 모아 주공의 승리를 막아야 한다. 말하자면, 이제부터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공은 승리를 얻기 위해 자기의 주도권을 끝까지 쥐고 가야 하며, 주공도 프렌드도 되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주공의 승리를 막기 위해 어떻게든 주도권을 일부 뺏어 와야 한다.


사실 아빠가 '주도권'이란 말을 하기 전까지, 마이티가 이런 게임인 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주공이 내는 카드를 바쁘게 쫓으며 그의 승리를 막기 위한 방어에만 골몰했을 뿐이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주공'을 해야 이 게임의 진짜 재미를 알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해도, 패가 안 좋다는 이유로 나는 늘 주공에 도전하지 않았다. 아빠 말대로 주공을 하면 주도적으로 전략을 짜서 그 판을 끌고 가야 하는데, 나는 그런 배짱도 전략도 없이 따라가는 마이티를 해왔던 거다.


늘 누군가의 카드대로 움직여도 큰 욕심이 없었던 회사에서, 얼마 전 처음으로 내가 주도권을 가져왔다고 느낀 적이 있다. 바로 퇴사라는 카드를 던지면서다. 늦어지는 인수인계 일정을 빨리 정리해달라 보채고, 지금껏 마음에 안 들어도 가만히 있던 일들에 의견을 보탰다. 이렇게 있으니 하루하루가 더 견딜 만도 하고 어떤 면에선 재미도 느낀다. 왜 나는 이전엔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다만 이런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오는 실수도 생긴다. 굳이 안 해도 될 쓸데없는 말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나름 내쪽으로 유리하게 끌고 간다고 꺼냈던 말이 덫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니 여전히 한 장 한 장 카드를 내려놓을 때마다 이 패가 아니면 어떡하지, 주도권을 빼앗기면 어떡하지, 손이 떨린다.


내가 마이티를 잘 못한단 말에 아빠는 그 좋아하시는 술도 마다하며 결국 집에서 마이티 판을 벌이셨다. 아빠 세대에는 3명이서 하는 마이티도, 더 많이 7명이서 하는 마이티도 있었다 한다. (그런데 5인이 가장 밸런스가 좋고 재미있어 지금은 대체로 5인플만 하는 모양이다.) 주춤하는 나에게 계속 일단 해봐, 중요한 건 기세야!라고 외친다. 주도권을 뺏겨봐야 다시 가져오는 법도 배운다. 여기서 틀려봐야 밖에서 안 틀려. 돈내기도 아닌데 어때, 그냥 계속해봐.


아빠랑 몇 번 하면서 마이티의 정신(?)을 터득한 뒤론 친구들이랑 할 때도 틈틈이 주공을 잡게 되었다. 다만, 그리고 외친다 "프렌드야, 미안해!" 엄청나게 얻어맞을지도 몰라. 이 패는 주도권을 잡기에 부족한 패였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러면 어때, 게임이잖아!

패가 안 좋다고, 내 패를 믿을 수 없다고 자꾸만 주도권을 포기해 버릇하면 좋은 패가 와도 제대로 쓸 줄 모르게 된다. 아니 일단 그게 좋은 건지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젠 큰 점수차로 지더라도 일단 자꾸 해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다른 친구도 말한다. 그래, 계속 해봐. 뭐 어때, 원래 삶은 기세야. 하다보면 틀릴 수도 있는거지. 기죽지 말고, 미안해~ 하고 다시 또 해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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