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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Aug 04. 2024

같은듯 다른 동사의 세계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스페인어에는 ser 와 estar 동사가 있다. 둘 다 우리말로 하자면 '~이다' 정도로 해석된달까.

그렇다면 두 동사는 뭐가 다를까? 쓰이는 상황이 다르다. ser 동사는 대체로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할 때 쓴다. 이름이나 출신, 성격이나 외모, 직업 등. 나는 한국 사람이야. 나는 회사원이야. 나는 키가 작아. 너는 키가 커. 이런 표현을 할 때 쓰는 것이 ser 동사다.

반면 estar 동사는 주어의 어떤 상태, 변할 수도 있는 상황을 표현할 때 쓴다. 나 지금 피곤해. 나는 산책하고 있어. 너는 결혼을 했어. 그건 책상 위에 있어. 등등. 대체로 언젠가 변화할 수 있는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다. 직업을 말할 때는 ser 동사를 사용하지만, 실업 상태일 때는 estar를 사용한단다. 그러니까, 보통은 직업이 없는 것, 실업 상태가 가변적 상태인 거다.


한참 동안 글을 안 썼다. 바빴다. 는 핑계고, 쓰기 싫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무리 글을 쓴들, 나는 ser 동사로 표현하는 '쓰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만, 잠깐씩 글을 쓰는 상태에 머무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의욕이 떨어졌달까.


꽤 오랫동안 무언가로 정의되는 것을 못 참는 사람이긴 했다. 누군가 너는 직장인이구나, 라고 말하면 직장을 다니고 있을 뿐, 그만큼 여행도 떠나는 사람이야. 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다른 누군가가 너는 여행가구나, 라고 말하면 그렇지만 난 여행가라 불릴 만큼 깊이 있지 못해, 그저 발버둥 치고 있는 사람이야. 라고 답했다. 아마 또 다른 누군가가 와서, 너는 발버둥 치는 사람이구나, 라고 말했다면 나는 또 그러기엔 이만큼이나 기반을 다져놓은걸? 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야. 라고 답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이제 와서야 ser로 표현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의욕이 떨어지는 걸까. 사실 난 오랫동안 ser가 아닌 estar로 살고 싶었다. 그래야 더 넓은 세상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은 무언가로 정의되는 게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에너지와 시간과 열정과 노력 등등을 한 방향으로만 쏟아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다고 대충 살아왔던 것은 아닌데, 이만큼 자라서 보니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ser로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estar의 세계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잠시의 상태. 그렇기에 나는 계속 변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습도 상태도 만나는 사람들도 직업... 아니 직장도. 다시 한번 estar의 세계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잠시의 상태. 그렇기에 나는 늘 혼자라고 느꼈다. 언젠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해있을 곳, 머무를 곳을 정하고 그 안에서 정착할 준비를 할 때 나는 울타리를 넘는 것이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만 울타리를 찾을 수 없을까 봐 무서워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또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날아가는 생각을 잡고 싶어서라도, 쓰기의 공백이 더 길어지기 전에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ser가 되기 위한 글쓰기가 될까 혹은 여전히 estar에 남아있는 글쓰기가 될까. 이건 울타리를 넘어가는 글쓰기가 될까 혹은 내가 머물 울타리를 찾기 위한 글쓰기가 될까. 글을 쓰며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ser의 세계는 시간과 자기 자신의 믿음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는 세계였다고.

아 물론, 이건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 ser 동사만으로 또는 estar 동사 만으로 표현되는 주어는 없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떨 땐 ser로, 어떨 때는 estar로 표현된다. 때때로 헷갈리기 쉬워 두 동사를 구분해서 쓰는 문제가 시험에 나오기도 하는 거고. 그래서 그런 문제는 다 잘 맞히냐고?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아무튼 나는 그저 스페인어 공부를 하는 중일 뿐이니까. 앗 이거 봐, 또 estar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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