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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방울 Dec 16. 2023

작은 사치의 위로- 무죄가 준 보상

생계형 가장의 평범하게 분주한 일상의 조각  

얼마 전 형사법정에서 1년을 치열하게 다툰 나의 의뢰인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를 받지 못하면, 가령 선고유예라도 나오면 의뢰인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상황이어서 수임할 때부터 적잖은 부담을 가지고 시작했던 사건이다.


증거 의견을 밝히는 첫 공판기일이나 증인신문 전날에는 긴장감에 잠을 설쳤다. 매회 다양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증인신문에서 다소 모호하거나 엇갈린 증언이 나올 때마다 소리 없이 탄식하고, 만약 신문사항을 다르게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그날 밤은 이불킥을 날렸다.


그렇게 1년 가까이 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사건을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면서 의뢰인이 공소사실의 범행을 한 사실이 없음을 뒷받침할 만한 풍부한 논거를 머릿속에 구조적으로 그려 넣고 있었다. 막상 선고기일을 몇 주 앞두고 작성한 변론요지서는 수차례 구상을 끝낸 터라 비교적 가볍게 털어냈다.


흔히 변호사시험 합격자 발표일이 가까이 다가오거나 당일이 되면 걱정하지 않던 이들도 잔뜩 긴장 태세였다는 후기를 많이 들었는데, 나는 직전까지도 덤덤했다.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했을 때 그냥, 휴- 짧게 안도했을 뿐이다.


그런데 무죄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 의뢰인의 변호인으로서 1년을 다툰 선고기일이 다가오던 나날은 몇 주 전부터 마음 어딘가가 진정되지 않았다. 선고 전날은 스트레스를 풀어주려 한 남편의 상냥함에 도리어 짜증을 확 냈다가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그날 법정을 꽉 채운 피고인들과 관계자 사이에서, 우리만 유일하게 무죄를 받았다. 차례가 거의 끝이었기에 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거나, 복잡한 사건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선고 내용은 간결했다.


"~~ 한 사정에 비추어 달리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


적어도 그날 하루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소식을 전하고 축하를 받으며, 가족들과 평온한 저녁을 보내고 잘 때까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다음 날-


한 사건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고 해서 훌쩍 기념여행이라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가 뜨고, 아이들 아침을 먹이며 출근 준비를 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시작하는 동안 전날의 벅찬 감동은 이미 빠른 속도로 희석되고 있었다.


오전은 사무실에 있다가, 오후에는 경기도 전세사기피해센터에서 상담이 있는 날이었는데 그 무렵 같은 상담위원으로 활동하는 변호사님이 센터 주변에 런치 할인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단돈 7,000원에 파는 훌륭한 카페가 있다고 알려줘서, 기억해 뒀다가 한 시간 전쯤 여유 있게 도착해 지도앱을 켜고 찾기 시작했다.


카페는 경기구도청 근처 언덕배기, 수원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오묘한 위치에 있는데 내부가 탁 트이고 힙한 분위기였다. 샌드위치와 커피 포스터까지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의기양양하게 런치 메뉴를 주문했다. 카운터의 직원이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저… 런치 시간이 지나서 세트는 주문이 안되거든요."


그때가 오후 1시 7분. 포스터를 자세히 보니 런치 할인이 적용되는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였다. 7분이 지나 할인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직원은 덧붙였다.


"근데 샌드위치는 하나 남은 거 있어서 사실 수 있어요."

"샌드위치만 사면 얼만데요?"

"6500원이요."


이럴 수가. 커피까지 주는 세트 메뉴와 500원 밖에 차이가 안 나다니. 순간 도청에 주차하고 카페까지 오는 길을 걸으며 잠시나마 즐긴 사색의 시간이 묘하게 후회됐다. 운전해서 바로 여기로 왔더라면 시간이 딱 맞았을 텐데-


그대로 메뉴판을 덮을 뻔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고 메뉴판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시그니처 메뉴로 표시된, 샌드위치 가격과 동일한 복잡한 이름의 스페셜 커피를 샌드위치와 같이 주문하고는 군말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13000원이요."


그렇게 받은 샌드위치와 스페셜 커피의 조합은 감동 그 자체였다. 남김없이 비우고, 태블릿을 펼쳐 오후의 독서를 조금 하다가 상담시간이 가까워져 다시 센터로 향했다. 그 언젠가 로스쿨에서, 변호사시험을 앞두고 시행된 6월 법전협 모의시험 첫날의 보상으로 2500원짜리 식사 메뉴(비빔밥, 칼국수)를 2개 시켜 혼밥을 하던 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힘겨운 시험을 처음으로 치른 그때의 나도, 1년을 다툰 형사사건에서 무죄를 이끌어낸 지금의 나도- 보상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걸 안다. 거창한 보상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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