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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May 11. 2022

내가 전업주부가 된 이유

딸은 엄마 인생을 닮는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누군가가 나를 대했던 그 태도로 아이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 박우란  


  엄마는 전업주부였다. 굉장히 섬세한. 여름이면 갈아입을 옷을 냉동실에 미리 넣어두었다가 꺼내 주셨고 겨울이면 전기장판 아래에 옷을 데워두셨다. 등하굣길에는 항상 창문으로 나와 동생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셨다. 주말이면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 놓고 다 같이 누워 공포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무섭다고 안아달라며 마음껏 어리광도 피웠다. 집 안은 항상 따뜻했다.

 알람을 맞춰 본 적이 없다. 나를 깨우는 알람은 언제나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의 소리였다. 잠이 덜 깬 채로 침대에 누워 칼질하는 도마 소리를 들었다. 방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냄새를 맡으며 '오늘은 된장찌개군'하며 잠에서 깼다. 가족여행이라든지 기념일에 멋진 식사나 선물을 받아 본 특별한 추억은 많지 않지만 매일매일 따뜻한 집에서 가족과 소소한 행복을 나눈 기억들은 가득하다. 말그대로 집이 최고였다.    

  

다른 집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엄마에게 매를 맞고 쫓겨난 같은 반 친구, 혼자 문을 열고 들어가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며 열쇠 꾸러미를 가방에 차고 다니는 친구를 보면서도 어쩐지 전혀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아서 믿기지 않았다. 엄마, 아빠의 싸움을 피해 집을 나왔다며 연락한 친구의 말은 사춘기 허세인 줄만 알았다. 불행한 가정사를 가진 집이 의외로 많다는 것은 대학에 들어와 봉사활동을 하며 처음 실감했고 사회에 나와 일을 하며 별의별 사연들을 접했다.   

   

 직장에서는 주로 저소득가정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사업을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가진 아이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여기에 신청한 아이들의 사연은 다양했다. 부모님의 얼굴도 모른 채 시설에서 자란 아이, 폭력적인 부모님 아래서 상처받은 아이, 부모의 신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 등 온전히 살아가고 있는 아이가 대견할 만큼 극한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많았다. 아직 미혼이었던 나에게 그 아이들과 매 달 만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큰 가르침을 주었다. 비슷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어딘가 묘하게 그늘진 아이가 있는 반면 당당하고 꿋꿋한 아이도 있었다. 나는 늘 그 차이가 궁금했다. 무엇이 아이를 바로 서게 만들었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후자의 아이들에게는 누군가의 굳건한 지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병든 부모든 부모 대신 자신을 키워 준 조부모든 혹은 자신을 믿고 도와주는 선생님이든 타인의 무한한 신뢰와 응원을 받고 있는 아이들은 엇나가지 않았다. 어른인 나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담담하게 이겨내고 있었다.      


그래도 전업주부가 될 생각은 아니었다.


 나도 아이에게 무한한 지지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전업주부가 될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어떻게든 일을 이어나갈 거라고 주변에 선언했다. 1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에 복귀했다. 아이는 친정엄마에게 맡긴 채였다. 퇴근하고 돌아와보니  친정엄마는 보채는 아이를 포대기로 업은 채 딸에게 줄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미안한 마음에 밥을 먹다 눈물이 났지만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전업주부가 되는 것은 운명이었을까? 출근 3일 만에 친정엄마가 다치셨다. 자주 드나들던 마트 주차장에서. 그 날따라 힘없이 넘어지셨다고 했다. 평소에도 관절이 안 좋았던 탓에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에서는 3개월의 시간을 줄 테니 어머니가 회복되는 대로 돌아오라고 했지만 나는 '퇴사'를 선택했다. 선택이라지만 딱히 다른 대안도 없었다. 남편과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었으므로 친정엄마가 아이를 돌봐주지 못한다면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다. 기관에 보내거나 도우미를 쓸 수도 있었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따뜻한 전업주부 엄마 밑에서 자란 나. 내가 받은 만큼 내 아이에게도 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전업맘이 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만약 그때, 친정엄마가 적극적으로 나서 어떻게든 아이는 내가 봐줄 테니 일을 계속하라고 했다면 내 선택은 달랐을까? 어쨌거나 친정엄마는 정반대였다. 아이는 엄마 손에서 키우는 게 맞다며 오히려 잘 된 일이니 일을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딸은 이렇게 엄마 인생을 닮는다.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마지막 출근을 하며 펑펑 울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날 것 같았다. 회사 출입카드를 찍다 주저앉아 또 울었다. 육아휴직 후 3일 만에 하는 퇴사였으므로 별다른 인수인계 과정도 필요 없었다. 그렇게 워킹맘 3일 천하는 막을 내렸고 나는 전업맘이 되었다. 전업맘이 되자 주변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제는 주말부부로 지낼 이유도 없지 않느냐 남편을 따라 당장 지방으로 가라든가, 이 참에 둘째를 낳아 같이 키우라는 말도 수없이 들었다. 전업맘이 된 내 허탈한 심정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나 조차도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을 할 때, 엄마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도 공부를 많이 했더라면 내 일을 가졌을 텐데..."

 "너는 꼭 너의 일을 해라."

 "가족에게 희생만 하지 말고 너의 인생을 살아라.“     


 전업주부 7년 차가 된 지금. 나는 안다. 엄마의 인생을 닮기로 '선택'한 것은 나였음을. 그렇다. 나는 내 아이에게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것처럼 따뜻한 집을 선물하고 싶었다. 귀가한 아이를 안아주고, 어리광 부리는 아이의 투정을 온전히 받아주고 싶었던 거다. 꼭 전업주부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는 자신의 일을 놓지 않으며 동시에 아이도 훌륭하게 키워내는 워킹맘을 존경한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내가 전업주부가 되는 것 외에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우리 엄마도 나를 그렇게 키워냈으니까. 본인의 인생을 포기하며.      


 나는 엄마 인생을 닮기로 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해 준 마음과 방법, 따뜻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한 노력만은 온전히 배우기로 했다. 하지만 엄마의 인생을 답습하지는 않을거다. 엄마는 이루지 못한 ‘엄마만의 인생’도 꼭 찾을 거다. 나는 전업주부로 살며 엄마의 인생도 지키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발레를 한다. 그곳 어디에서라도 엄마의 인생을 찾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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