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 듀런트 선생님께

- <내가 왜 계속 살아야합니까>를 읽고

by 편지큐레이터

당신이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9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온 편지였지요. 1931년 7월 15일. 당신이 100명의 지성인에게 보낸 편지를 지난 2020년 1월에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당신이 정한 100명의 지성인도 아니고, 당신의 편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지만요.


지난 1월, 연휴를 앞두고 서점에 들렀습니다. 서점 매대에 나란히 누워있던 책 사이에서 <내가 왜 계속 살아야합니까>라는 제목을 발견했지요. 제목이 저를 잡아 당겼습니다. 왜 살아야 하느냐고 묻고 또 묻던 제 마음을 말입니다.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묻고 세계의 지성 100인이 답하다’는 글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책을 펼치니 1930년 가을, 당신을 찾아와 ‘죽고 싶다’고 고백한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는 당신에게 자기가 왜 계속 살아야하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면 그냥 죽어버리겠다고요. 뭐 이런 황당한 사람이 있나 싶었지만, 1930년은 그런 때였다는 걸, 모든 상식이 무너지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휘청이던 때였다는 걸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가 찾지 못한 답을 누군가 찾아주기를 바라던 사람들이 많았던 때였지요.


당신에게 삶의 이유를 찾아달라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저는 2020년의 오늘을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이유를 잃고, 스스로 삶을 거두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금’을 말입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이유가 당신의 편지를 계속 읽게 했습니다.


당신은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신’의 자리에 ‘과학’이 들어앉았다고 말합니다. 그 후 철학자는 철학의 시선으로만, 과학자는 과학의 시선으로만, 심리학자는 심리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고 꼬집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신이 없으니 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요. 하지만 철학자인 당신은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이 왜 살아가는지. 사람들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신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당신은 ‘지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영적지도자와 수상, 작가와 저술가, 북극 탐험가와 피아니스트, 역사가와 심리학자, 대학 총장과 테니스 선수, 성직자와 해군 소장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지요.


‘당신에게 삶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이 당신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지, 종교가 당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만약에 준다면), 당신의 영감과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당신을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 혹은 원동력은 무엇인지, 당신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하는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를 알려 달라고.

당신의 편지가 도착한 곳에서 답장이 날아옵니다. 친절한 편지도 있었고, 퉁명스런 편지도 있었지요. 저도 밑줄을 긋거나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삶은 무엇인가를.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정의가 필요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게 가장 시급했지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서 숨만 쉬고 있는 것도 살아가는 것이고, 내 안에 있는 모든 열정을 불태우며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는 것도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나는 당신이 말한 ‘삶’이 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갖고 격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신의 질문 안에 있는 ‘살아간다는 것’이라고요.

이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 갑자기 고등학생 때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한 친구게 제게 말했습니다. “너는 너 잘난 맛에 사는 얘야.”라고요. 그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친구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고 살았나 싶었기 때문이지요. 친구에게 물었더니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삶을 사는 자세가 무척 당당해 보인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사는 것 같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저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친구에게 당당해 보였던 그때, 저는 날마다 죽음을 생각했으니까요.


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컴퓨터프로그램을 전공하는 학교였지요. 내로라하는 수재들 사이에 끼여서 허덕일 때였습니다. 성적은 더 이상의 내려갈 수 없을 정도의 바닥이었고, 남들이 다 취득한 자격증이 제겐 없었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일기장에 비극의 단어들을 휘갈겼습니다. 죽고 싶다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친구의 눈에는 제가 ‘나 잘난 맛에 사는 아이’로 보였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그 친구의 말을 이해한 건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고, 좌충우돌 할 때였지요.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일기장에는 절망의 단어들이 쌓였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친구들은 내게 말했어요. “너처럼 살고 싶다”고요. 그 때 알았습니다. 친구들에게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걸.


학교를 다닐 때도 날마다 죽고 싶었지만, 중창반을 만들어 노래를 하고, 교지 편집을 하고, 성당 활동을 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도 마음은 온통 두려움이 차지했지만 몸은 책을 읽고, 자료를 찾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지요. 아마도 나는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내 모습’을 보며 살아갈 힘을 얻었나봅니다. ‘창조에 대한 갈망’이 죽음의 음지로 넘어가지 못하게 나를 붙든 것이지요.


나는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만들기 위해 존재하고, 만들 수 있다는 기쁨이 나를 살게 했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좋았지요.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시작해 성과를 보고 있었고, 글 쓰는 일을 하며 인정받았고, 아이들도 건강했으니까요. 그러나 내 건강이 문제였습니다.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암”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습니다. 나를 통곡하게 만든 건, 써야 할 글도, 해야 할 공부도,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들. 일곱 살인 큰 아이와 두 돌이 되지 않은 작은 아이… 그들이었습니다.


나는 살아야했습니다. ‘만드는 것’에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아이들의 ‘엄마’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엄마’로 존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 내 삶을 지속시키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다행이 제 병이 ‘암’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만큼 아팠고, 그것만큼 절망적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무너뜨리려 했던 병은 아니었어요.)


당신에게 답장을 준 사람들이 ‘가족’의 소중함을 말했듯이 내게도 가족은 살아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러나 삶이란 것은 단순하지 않더군요. ‘창조’에서 ‘가족’으로 삶의 이유가 넘어온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어요. 위기의 순간에 가장 소중한 존재는 가족이지만, 위기가 아닐 때 나는 또 창조를 꿈꾸었습니다. 무언가를 쓰고, 그것을 나누고, 누군가 내가 쓴 글 한 줄에 위안을 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그것에서 나는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결국 가족과 창조가 나를 살게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또 물었습니다. 종교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느냐고요. 물론입니다. 종교는 내 삶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당신은 ‘종교가 인간의 희망을 무덤 속에 가져다 두었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 덕분에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내가 고통 속에서 바라보는 희망이 당신 눈에는 ‘희망고문’ 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제겐 아닙니다. 종교를 통해서 내가 발견하는 희망은 가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안착해 또 다른 희망을 만듭니다. 그 희망은 기쁨이기도 하지만, 위안이 되기도 하고 나를 살게 합니다. 종교에서 비롯되는 영성은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새로운 길을 안내합니다. 그래서 나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아니 끝난 이후에도 그 안에 머물고 싶습니다.


영감. 내가 영감을 얻는 곳은 ‘모든 곳’입니다. 영감은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나,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리고 혼자서 설거지를 할 때도 문득문득 영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장 큰 영감을 얻을 때는 자연 속에 ‘홀로 머물 때’입니다. 사람이 아닌 자연과 오롯이 마주했을 때지요. 나는 나무와 꽃과 바람과 햇빛을 보며 창조에 대한 영감을 얻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죽고 싶거나 죽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자연 속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자연 속에 있으면 살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내가 있다는 것, 이들과 내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 가슴에 큰 울림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나를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 혹은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이 질문에 저는 두 개의 단어를 놓겠습니다. ‘진보’와 ‘연대’입니다. 당신이 지성인들의 답장을 공개하기 전에 쓴 글에서 ‘진보’를 만났습니다. 당신은 말했지요. ‘모든 것이 진보했다. 인간만 제외하고.’라고요.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진보’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해보았습니다. 진보가 무엇이기에 모든 것이 다 했는데 왜 인간만 하지 못했는지 생각해보았지요. 내가 생각한 ‘진보’는 ‘더불어 연대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손잡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보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만큼 진보하지 못한 종도 없겠지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유치하고 어리석고 모순적이고 살인적이고 자멸적’이니까요.


나는 이런 인간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이런 이기적이고 살인적인 인간들로 가득차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좋겠고,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모든 이가 존중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이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이런 세상을 꿈꾸며 나는 노력합니다. ‘연대’로 ‘진보’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온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과 내 삶의 궁극적인 가치는 그것입니다. 나로 인해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내가 쓰는 편지 한 통이, 내가 하는 말 한미다가, 내가 부르는 노래 한 곡이 누군가의 가슴에 가 닿아 그가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의 가슴에 먼지 한 톨 만한 변화의 씨앗이 떨어지는 것이죠. 씨앗이 발아할지 썩을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변화된 사람, 변화된 세상을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요.


당신에게 편지를 쓰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는군요. 당신의 편지를 읽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내 머릿속에서는 무언가가 자꾸 떠올랐고, 손은 책의 빈 공간에 생각을 적었지요. 당신의 편지는 책으로 치자면 작고 얇은데 그 어떤 책보다 많은 생각을 쏟아붓게 했습니다. 당신에게 건네지 못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줄이려고 해요. 너무 긴 편지는 지루할 수도 있으니까요. 당신에게 전하지 못한 이야기는 제 노트에 적었다가 언젠가 새로운 글로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한 통의 편지가 되어 누군가의 우체통 속에 도착할 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답장은 이즈음에서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편지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착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질문이 2020년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그 질문을 곱씹으며 저처럼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답장으로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1930년대에 쓴 편지에 2020년대에 쓴 답장을 함께 나눌 수 있겠지요. 운이 좋다면 2100년을 사는 누군가 2020년에 살았던 우리의 이야기를 또 다른 편지로, 또 다른 책으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 전에 출판사에 귀띔해 주세요. p58에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출생년도와 p60에 헨리멩켄의 출생년도를 확인하라고요. 아무래도 출생년도를 수정해야 할 것 같거든요.)


마지막으로 당신과 당신을 찾아왔던 이름 모를 그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하는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니까요. 살아가다 문득, 또 다시 <내가 왜 계속 살아야합니까?>라는 의문이 밀려오면, 당신의 편지를, 지성인들의 답장을 펼쳐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당신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다시 살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2020년 2월 서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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