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스트>를 읽고 -
당신이 쓴 소설 <페스트>를 읽었습니다. 쥐에서 비롯된다는 전염병, ‘흑사병’이라고도 불렸던 페스트가 한 도시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알려주는 소설말입니다. <페스트>는 1940년대 북아프리카 알제리 지역에 있는 프랑스 식민도시 오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오랑은 아름다운 항구도시였지요. 해마다 여름이면 해변에 관광객이 쏟아지던 바닷가 도시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해 4월 16일 아침, 병원 계단에서 죽은 쥐 한 마리가 발견되면서 오랑은 공포의 도시로 변해갑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쥐의 사체가 한 마리에서, 수십 마리로, 수십 마리에서, 수백 수천마리로 쌓여갔으니까요. 며칠이 지나고 쥐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쥐가 사라진 후,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쥐 대신 사람이 죽기 시작한 것이지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의사 리외였습니다. 그는 아픈 부인을 요양원에 보내고, 노모를 모시며 사는 성실한 의사였지요. 리외는 피를 토하며 죽은 쥐와 사람들의 목과 사타구니에 생기는 멍울을 보고 이것이 페스트 일것이라고 예감합니다. 그러나 오랑시장은 그럴 리가 없다며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상황을 더 지켜보자고 합니다. 공무원들이 아닐거라고 머리를 저어대는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갔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같은 증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기자 오랑시장은 그제야 도시를 봉쇄하고 대응에 나섭니다. 그러나 이미 페스트는 오랑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들로 인해 또 누군가 감염이 되고, 의료진은 지치고, 누군가는 이 기회를 틈타 이익을 챙기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에 사람들이 절망하는 과정을 보면서, 이 이야기가 1950년대에 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이 책을 썼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당신의 소설은 2020년의 세상과 닮아 있었으니까요.
2019 겨울, 중국에서 몇 몇 사람이 폐렴증상으로 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리외와 같은 의사 한 명이 이것은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이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그의 말은 허공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지요. 그러는 동안, 새로운 바이러스는 중국과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 바이러스는 사람의 몸속에 기생하며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눈부신 과학발전에도 불구하고 5십 8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을 거두었고,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의 의사들은 환자들을 살리는 일보다, 누구를 죽게 버려둬야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당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의사 리외처럼 말입니다. 환자를 살리는 일보다, 사망 선고를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고 괴로워하던 리외말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 어딘가에서도 초기에는 존중받았던 시신들이 당신이 소설 속 이야기처럼 해치워야 할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신 한 구 한 구에 묫자리를 마련하다, 결국 한 구덩이에 수십 구의 시신을 던져놓고, 석회 가루를 뿌리고 또 수십 구의 시신을 던져 막아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 지도 모르지요.
오늘날의 교회나 성당에도 당신이 만들어낸 ‘파늘루 신부’가 존재합니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이 바이러스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그러니 그 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목회자말입니다. 이 기회를 틈타 마스크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여서 폭리를 취하는 ‘코타르’도,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니 봉쇄된 도시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소리치는 ‘랑베르’도 존재합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소설 속 배경인 1940년대와 80년이 지난 2020년대는 같은 시대인 것 같군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정적인 모습만 그대로 간직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외지인이었지만 오랑의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하고 페스트 시대를 기록하며 자원봉사대를 만든 타루나,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시간을 쪼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 쓰는 그랑과 영웅이나 성자가 될 수 없어 의사가 되었지만, 그 어떤 영웅보다 그 어떤 성자보다 아름다운 리외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니까요. 그리고 오랑은 나와 상관없다고 외치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랑베르와 모두가 신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라고 외치다, 결국 신보다 인간이 더 중요함을 느끼게 되는 파늘루도 이곳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말한 것처럼 함께 연대해 희망을 만들어 가고 있지요.
얼마전, 당신이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그렸던 청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은 작품들을 통해서 부정과 긍정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 했다지요. 햇빛이 눈부셔서 방아쇠를 당겼다는 뫼르소가 등장하는 <이방인>이 부정이라면, 헤어나올 수 없는 죽음의 상황에서 함께 연대하며 희망을 만들어 가는 <페스트>가 긍정의 작품이라고요. 그렇다면 당신이 쓰려던 ‘사랑’에 관한 작품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신이 1960년 어느 날,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랑’ 작품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당신이 세상에 남긴 ‘사랑’작품은 없지만 나는 당신의 모든 글 속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약한 이들에게 연민을 품고, 아픈 이들과 공감하려고 노력하고, 불의에 저항하며 올바른 길로 가려고 했던 당신이 보이니까요.
<페스트> 속에서도 저는 그런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노인의 집 발코니에서 타루와 리외가 나누던 대화에서였지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던 타루에게 리외가 묻습니다.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생각해보았느냐?”고요. 타루가 대답합니다. “네. 공감의 길이지요.”라고요. 그 문장을 읽으며 당신이 작품들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빠지든 함께 손잡고 연대하며 희망을 만들어 가길 원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라고요. 그리고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또한 사랑이라고, 당신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페스트>의 책장을 덮으며,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봅니다. 무엇을 해야 당신이 말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요. 어쩌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누군가와 함께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나의 연대이고 사랑이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다짐합니다. 당신의 책을 읽기전보다 더 많이, 더 뜨겁게 살아야겠다고요.
삶을 사랑했던 당신, 하늘에서 평안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