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지우고 현실로 걸어간 아키님께

- 《금수(錦繡》를 읽고

by 편지큐레이터


여름의 끝자락에 놓인 오늘,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쓸쓸함이 내려앉아 부러 당신의 편지를 찾아 읽었습니다. 당신과 전 남편이었던 야스아키님이 주고받은 열 네통의 편지를요.


두 사람의 편지를 엮은 책은 《금수(錦繡》(미야모토 테루, 송태욱 옮김/바다출판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금수란, ‘수를 놓은 직물’, ‘아름다운 직물이나 화려한 의복’, ‘아름다운 단풍이나 꽃을 비유하는 말’, ‘시문, 훌륭한 문장을 비유하는 말’이라는데, 어째서 당신의 편지에 이런 제목이 붙은 걸까요? 나는 조금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당신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편지는 당신이 10년 만에 우연히 만난 야스아키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10년 전,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부부의 연을 끝냈던 일과 야스아키와 헤어지고 난 후, 혼자 시간을 죽이며 고요히 살아간 이야기를 편지에 적습니다. 그러다 ‘모차르트’를 만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가정을 꾸리며 살게 되었다고요. 그러나 당신의 가슴 속에는 ‘왜?’라는 물음과 ‘야스아키 때문에’라는 원망이 공존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10년을 살아가다 우연히, 케이블카 안에서 몹시 궁색하고 초라한 차림을 한 야스아키를 만났다고요.


당신은 야스아키의 주소를 수소문 해 그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야스아키가 편지를 읽지 않고 그대로 찢어버린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에게 꼭 편지가 닿기를 바라며 우체통에 편지를 넣지요.


당신의 편지를 받은 야스아키도 당신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당신의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하지는 않지만 그때의 일을 사과하는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야스아키는 두 사람의 편지가 더 이상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과거는 과거 속에 묻어두자는 뜻이었겠지요. 그에 반해 당신은 당신의 현재를 이렇게 만든 그 과거를 제대로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당신이 살고 있는 지금의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나는 당신과 야스아키가 쓴 열 네 통의 편지를 읽으면서, 사랑이 준 상처가 아무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헤집고 벌려놓은 마음이 10개월에 걸쳐 조금씩 아무는 것을 본 것이지요. 그러나 상처가 아물어도 흔적은 남는 법입니다. 시간이 상처를 아물게 해도 그 자리에 남은 흔적까지 말끔하게 지우지는 못하니까요. 당신과 야스아키도 그걸 알고 있었고, 마지막 편지를 마치며 그 흔적을 간직한 채 살아가기를 받아들입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같은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 것이지요.


나는 당신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어쩌면 어른이란, 환상을 지우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라는 환상을 지우고 현실을 살아가는 당신과 야스아키의 모습에서 문득 ‘어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른이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환상을 지우며 살아가는 건 제게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언젠가 사라질 물거품 같은 것일지라도 저는 가슴 한 쪽에 간직하며 살고 싶습니다. 현실이 지옥 같을 때 환상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 환상이 우리 마음에 아름다운 수를 놓고, 삶을 단풍으로 물들게 한다는 걸 믿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당신과 야스아키는 환상을 지우고 현실로 걸어갔지만, 저는 환상을 꿈꿔 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스아키가 마지막 편지에 썼던 것처럼 언젠가 야스아키가 당신이 있는 집 앞을 지나며 은엽아카시아 고목을 바라보기를 바라겠습니다. 두 사람이 영원히 마주하지 못한다 해도 은엽아카시아가 서로의 안부를 전해주기를, 그래서 나무에 든 단풍이 당신들의 마음에도 내려앉는 날이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2021년 여름의 끝에서 수를 놓고 있는 친구드림


gumsu.jpg 《금수(錦繡》(미야모토 테루, 송태욱 옮김/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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