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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May 08. 2021

1. 친한 형이 컨닝을 제안했다(上)

헌병은 서서 생각한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형은 내게 컨닝을 제안했다. 




결국 나도 남들 따라 20대 초반에 입대를 했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던 때라 도망치듯 훈련소로 향했던 것 같다. 숨 막혔던 대학 입시를 끝내고 늘어질 대로 늘어진 나는 저질 체력이었고, 생활의 온갖 패턴들 또한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그랬으니 훈련소 생활이 수월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도 3km 달리기 기록을 기준으로 볼 때, 나는 내심 체력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중간에 잠깐 걷지 않으면 도저히 완주할 수 없었는데, 나중으로 갈수록 몇 명은 제치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 체력으로는 대대 전체에 돌았던 감기를 이겨낼 수 없었다. 3주 차 즈음부터 대대 전체가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대대 건물이 재건축을 앞두고 있어 겨우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시설만 유지·보수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먼지를 비롯하여 난방, 온수 문제 등 2월 군번이 견디기엔 조금 가혹한 환경이었다. 의무대에 가서 타 온 약을 먹어도 도통 낫지 않던 감기는 결국 훈련소가 다 끝나고 자대에 갈 때까지 이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긴 했지만 이렇게 길게 감기를 앓아본 적이 없어서 나도, 부모님도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여차저차 훈련소를 잘 수료할 수 있었던 것은 날 잘 챙겨준 소대원 형들 덕분이다. 오늘은 바로 내 옆자리에서 함께 생활했던 형 A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무릇 서평이 책 그 자체보다 서평을 쓴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듯, 이 글은 A에 대한 글이지만 사실은 내가 드러나는 글일 테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A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군대라는 소셜 믹스의 현장에서 나와 비교적 많은 배경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입대 이전, 나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유학생이었다. 몸을 핑계로 마음도 멀어진 고향 친구들과의 연락은 뜸해졌고, 내 주변은 ‘서울, 대학생’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하나 둘 채워졌다. 구석구석 퀴퀴한 먼지가 쌓인 생활관. 비교적 고향과 가까운 이곳에서 나는 고향 사람이 아니라 '서울, 대학생'인 사람을 찾아 헤맸다. 20명 남짓한 인원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사람이 더 많은 공간. A는 내 바로 옆자리에서 유달리 튀어나온 이마와 또렷한 눈빛을 가진, 호감가는 인상의 빡빡이였다. 




첫날 소등 후 모포 위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다들 잠들지 못하던 와중,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렇게 이야기는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알고 보니 A는 '서울, 대학생'이었다. 당시 협애한 관계관을 지녔던 나로서는 썩 반가운 일이었다.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유쾌한 성격에 리더십도 갖춘 A를 가교삼아 나는 다른 소대원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매일 밤 남은 훈련일수를 하루씩 지워가며, 인신의 자유를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전우애 같은 것이 싹트는 듯 했다. 


그러나, 너무 친해진 탓일까. 이후 나는 A와 함께 자주 엎드려뻗쳤다.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대기해야 하는 시간에 몰래 떠들거나 장난을 쳤다. 내 짧은 인생을 통틀어 누군가의 기대와 감시에 부응하지 않으며 이처럼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다. 소소한 일탈에서 오는 묘한 쾌감이 있었다. 이 재미를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입시는 크게 망할 뻔 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학창 시절 내내 작은 일탈도 해본 적 없는 나는, 이제서야 여느 또래들과 모종의 일체감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A와 권위의 사각지대를 찾고 그 안에서 작은 자유를 추구했다. 학교의 권위에 그토록 충실했던 내가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공간에서 나를 강제하는 권위는 순수하게 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산뜻하게 도망칠 수 있다니. 끌려온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내적 동기는 없었다. 이곳은 열심히 한 만큼 성장하거나 인정을 받는 학교가 아니었다. 이 시간에 충실하지 않아도 손해볼 것이 없었다. 2년 간의 군생활, 그 중에서도 훈련소에 있는 동안은 엄밀히 말해서 숨만 쉬어도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 아닌가. 물론 하라는 건 적당히 하긴 해야 했다. 얼차려 받는 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적당히 하고 눈치껏 빼면 되는데, 나는 관성적으로, 남들보다 더 게으르지 못했다. 겁 많은 모범생으로 살아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1500명 중 두자리대 등수로 훈련소를 마무리했다. 나는 왜 좀더 대충할 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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