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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갱 Oct 08. 2020

밤조림

시간과 계절을 아우르는 것


준비물

햇밤 1kg (껍질 벗기면 600g 정도), 베이킹소다 1t, 설탕 400g, 간장 1.5T, 럼 1.5T


조리과정

1. 밤을 따뜻한 물에 한 시간 정도 불려 놓는다.

2. 유리병을 열탕 소독한다. (상온의 물에 담가 서서히 끓이고, 바르르 끓기 시작하면 병을 건져 물기 없이 말려놓는다.)

3. 껍질을 불린 밤은 안쪽의 속껍질이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벗긴다. 속껍질이 상하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4. 볼에 겉껍질을 벗긴 밤(600g 가량)을 담고, 밤이 잠길 만큼의 물과 베이킹소다 1t을 넣어 반나절 정도 담가놓는다.

5. 반나절이 지난 후 밤을 담가놓았던 물까지 모두 냄비에 그대로 옮겨 담고 중불에서 30분간 끓인다.

6. 삶은 밤을 찬물에 옮겨 조심스럽게 세척한다. 밤 가운데 낀 심지 부분도 함께 제거한다. (일부러 힘을 가해 닦지 않고 자연스럽게 밀려나가는 부분만 세척한다)

7. 냄비에 손질한 밤과 밤이 잠길 정도의 물을 담고 약불로 30분간 끓인다.

8. 삶은 밤은 다시 찬물로 조심스럽게 세척한다.

9. 다시 밤과 물을 냄비에 담고 약불에서 30분 끓인다.

10. 다시 찬물에 세척한다.

11. 냄비에 마지막으로 밤과 넉넉한 물을 담고 설탕 400g을 넣은 다음 뚜껑을 열고 졸인다.

12. 시럽이 반쯤 줄 정도로 졸여지면 럼 1.5T, 간장 1.5T를 넣고 10분 더 끓여 마무리한다.

13. 한 김 식힌 밤조림은 유리병에 담고 완전히 식으면 냉장고에 넣어 보관한다.

14. 2~3개월 후 오픈한다.



 올해 추석에도 어김없이 회사에서 밤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밤만큼 가을이라는 계절의 느낌을 담은 식재료가 또 있나 싶다. 바람이 선듯해지고 차분한 웜톤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 숲의 그 냄새를 반영하고, 올망졸망 살이 오른 다람쥐의 눈망울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것은 감, 사과, 배처럼 일상적인 식사 후 가볍게 하나 집어 들 수 있는 달콤한 디저트라고 볼 수도 없고, 고구마나 감자처럼 포근하고 듬직하게 배를 채워주는 구황 작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손질은 또 얼마나 번거로운지, 번잡한 명절의 한가운데에 아버지들의 맡아놓은 역할이었을 정도로 밤은 견고하고 단단하며 집중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평소에 잘 떠오르지 않는 어떤 열매, 달면서도 포근하지만 추석이나 되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것, 그것이 밤의 오묘한 포지셔닝이다.

 하지만 나란 사람, 제철이라는 말에 마음이 두근거리는 사람이다. 일 년 중 어떤 시기, 어떤 제철에만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제철에만 느낄 수 있는 맛이 있다는 것에는 어쩐지 아날로그적인 설렘이 있다. 모든 것을 클릭 한 번에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이 세상에서도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무력해지게 되는 것이 묘하지만 또 그것은 그것대로 반가움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리운 사람에게 받는 카카오톡 메시지보다 오랜 시간 먼 길을 돌아온 편지 한 장이 더 뭉클하듯이. 그래서 이 설렘을 가장 최고로 즐기고 싶었다. 내가 쉽게 만나보지 못하는 그 산뜻한 달콤함과 따뜻한 풍미를 최상으로 올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또 다른 오랜 기다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인고의 세월 끝에 보들보들해진 밤들, 예쁘다.


 거실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다람쥐 가족처럼 밤을 까는 모습이 문득 재미있었다. 식사도 아닌, 그저 간식일 뿐인, 아직 먹어보지조차 않은 어떤 미지의 음식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집중한다. (어 정확히 말하면 나의 요구를 엄마 아빠가 들어주는 것이다.) 생 밤을 따뜻한 물에 불리는 것부터 마지막 유리병에 담아 식히는 것까지 거의 꼬박 하루가 걸렸다. 부디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단계 단계 성실하게 임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라는 의문이 무척 여러 번 들었지만 그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어떤 과정에서 어긋나지 않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게다가 이것은 우리의 이러한 성실함의 결과를 당장 확인할 수 없고 몇 개월 후에나, 잊을만할 때쯤 혹은 이 가을이 완전히 저물었을 때서야 확인이 가능하니, 노력의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일반적인 요리의 매력을 뛰어넘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장을 담그거나 김치를 담그는 것처럼, 요리보다는 일종의 어떤 노동이자 의식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러 번 삶고 조심조심 찬 물에 옮겨 담았던 밤의 그 맨드럽고 보드라운 촉감은 왜 속껍질을 온전히 남겨야 하는지 단번에 이해시켜 주고, 동시에 몇 개월 후 입 안을 감쌀 부드러움을 조금은 미리 그려보게 한다. 그 지루한 과정에서 과거와 미래를 본다. 하루하루의 고루한 성실함이 지난 세월의 나를 담고 미래의 나의 모습을 새로이 만들어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음식에 소량의 럼을 넣는 행위는 또 어떠한가. 이 럼은 정확하게 3년 전 이 맘 때, 럼의 나라 쿠바에서 데려와 고이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다시 갈 수도, 아니 다시 갈 엄두도 안나는 그 머나먼 타국에서 내가 데려올 수 있는 것이라곤 아름다운 기억들과 그리고 이 독하고 달콤한 술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변하지 않고 늘 아름다운 풍미를 전해주는 그 리큐르들 중에, 쿠바의 럼은 그 나라가 가진 카리브해와 사람들의 에너지를 닮았다. 매번 그 모습들을 생각하며 애플민트나 라임 같은 이국의 재료들과 럼을 즐기곤 했었는데, 오늘은 재미있게도 완전히 동양적이고 완전히 한국적인 밤 요리에 이것을 첨가한다. 이제는 그 기억이 과거임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현재에 과거의 아름다운 향기를 조금 추가해보는 것이다. 그것은 낙낙한 유리병 속에서 한국의 가을과 만나 감미로운 어떤 새로운 음식이 되어갈 것이다.


두 달 후에 보자!

 계절이 바뀌는 시점마다 어쩐지 설레고 또 외로운 느낌이다. 가을은 항상 고요하게 오고 겨울은 또 더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 오랜만에 옷장 깊숙이서 꺼낸 니트의 포근함처럼 그렇게 낯선 기분이다. 이제야 막 가을을 체감하는 이 시점에서 눈 내리는 계절을 기다리는 음식을 만든다. 지나가버린 계절의 달콤한 조각을 그제야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맛과 풍미는 어떠할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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