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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 May 15. 2024

그 하트 쪼만한거 그게 뭐라고  

책 [인정욕구]를 읽고

휴대폰을 켜면 나도 모르게 그라데이션 보라색 앱을 찾고 있는 내 손가락이 너무 못났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을 자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인간생을 사는데 굉장히 유용한 물건이니. 

하지만 틈만 나면 습관적으로 그 앱을 실행시키는 내 전두엽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은 또다른 자아의 힘이 너무 약했다. 여전히 나는 이 조그만 앱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아이폰에 원래 있는 기능인, 시간 제한 기능은 너무 손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 방편으로는 어플을 아주 마지막 페이지이 숨겨놓는 방법으로 제한도 해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도 망할 손가락이 알아서 찾아줬다. 그리고 그 앱을 실행시킨 후에 내 통장과 돈을 단시간에 뺏어갈 광고, 그리고 자극적인 컨텐츠들이 삽시간에 내 시선을 뺏었다. 


더욱 더 지독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조그만 어플을 지우기까지 몇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아마 다음에도 필요에 의해 다운로드 하게되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삭제 텀이 그리 길지 않아서 나름대로 대견하다. 


(미친거 아닌지,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가족사진 보정본이 도착하여 그것을 업로드 하느라고 앱을 다시 깔았다 지웠다 다시금 정신없이 광고를 클릭하고 결제하기 직전에 퇴마당한 마귀한테 남겨진 껍데기같은 육신처럼 정신이 차려져서 다시 하루만에 앱을 지웠다.)


최근 삭제는 언제였더라, 휴대폰을 바꾼다는 명목 하에 유튜브는 한 달을 넘겨서 깔았고, 

인스타그램은 일과 관련된 것 때문에 다시 보름만에 다운로드 받았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일 관련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시시각각 중독적으로 나도 모르게 친구들의 스토리를 보고, 내 스토리를

열어본 친구들의 목록을 본다. 내 스토리를 열어본 사람들의 리스트가 스크로를 내리는 데까지 오래 걸리면 걸릴수록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또 어떤 새로운 게시글을 업로드 해야 이런 좋은 반응이 나올까 무의식적으로 고민하는 나를 찾는데까지는 의외로 오래 걸렸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는 것이 조금 더 솔직한 심정이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언제까지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까지 이 조그마한 하트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할 것인가 하던 차에 애증의 인스타그램에서 이 책 광고를 봤다. 이거다 하고 바로 결제 버튼을 누르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인스타그램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좋아요 를 많이 받으려고 에르메스 가방을 샀고, 그 에르메스 가방을 사기 위해 시간과 돈을 들여 스카프와 악세서리 등을 구매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방을 얻기 위해 백화점 셀러분들에게 필요 이상의 시간과 질문과 돈, 그리고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매일같이 백화점에 갔고, 부가적으로 뿌리고 나갈 곳도 없는 향수도 몇통 더 집으로 들이게 되었다. 

그 전에는 샤넬 가방들을 샀고 예쁜 호텔에 갔다. 지난 달에도 예쁜 숙소를 가기 위해 검색하고 고민한 시간들이 얼마인가. 




몇 달 전에 신뢰하는 상담 센터에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역시나 답은 내 안에 있었다. 지긋지긋한 인정욕구 때문에 나는 늘 인터넷상의 댓글과 하트에 온 도파민을 빼았겼던 것이었다. 물론 모르지 않았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정욕구에 지배당하는 내 뇌 때문에 내 견해 말고 '전문가' 님의 견해가 내 셀프진단과 메타인지에 대해 그린라이트를 밝혀주자 마음이 놓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까지 이렇게 결단을 내려서 손쉽게 어플을 지우도록 내 마음을 움직였던 책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 책은 현대시대를 사는 스마트폰 유저에 맞추어서 촌철살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SNS의 유저 풀이 넓어질수록 그것에 대한 이득은 실리콘벨리가 가져간다. 이 거대한 사업구조에 개개인이 이렇게 온갖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앱을 지워봤자, 저항해봤자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덜 빨리 파도에 휩쓸릴 뿐 끝까지 나는 내 길을 간다 따위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저 단순하게 인터넷 상에 내 일상을 업로드 하고 지인 혹은 인터넷 지인과 교류한다라는 무시무시하게 무해한 것 같은 순백의 가면을 쓰고 사람들의 일상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방금도 생각하면서 휴대폰을 들었고 나도 모르게 이제는 무서우리만치 소름돋게 내 손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찾아보다가 꽃 어플을 발견하지 못했고 이내 내 손으로 삭제했다는 것을 인지했다. 부끄럽게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또 방금 알아챈 미친 사실이 있다. 


이 앱을 지우는데 가장 일조한 책의 구절은 이 부분이었다. 


지나친 티 내기로 미움을 사지만,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 

직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요즘 너무 바빠서 다 못 끝낸 업무는 집으로 가져가. 잠도 제대로 못 자니까

미치겠어" 라고 투덜대며 자신의 업무량을 티 내는 동료가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주변 사람들은 하고 싶은말이 목 끝까지 올라오지만 참습니다. 

'자기만 바쁜가?'

'일을 해도 끝이 없는 건 일머리가 없어서지.'

대단하다는 말이 듣고 싶어 동료들 앞에서 티를 내지만 결국 상대방의 짜증만 불러일으킬 뿐 입니다.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직장 밖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중략...

하지만 이런 티 내기는 보통 자신이 의도한 만큼의 효과는 얻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활에 진심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필사적으로 티 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질투심을 유발하지 않도록 숨기겠지요. 그래서 이런 게시글을 올리면 부정적인 반응이 많습니다. 

생각보다 잘 나온 사진은 SNS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포스팅은 대부분 무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작성자가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라면 온갖 비난을 하며 헐뜯기 일쑤입니다.

 "이 표정좀 봐바! 자기가 무슨 여배우인 줄 알아."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까 신났네 아주."

  "자기한테 잔뜩 취해 있네. 못 봐주겠다 정말."

하지만 작성자의 외모가 평범하다면 온갖 야유를 받습니다.

 "착각도 유분수지. 이 얼굴로 예쁜 척 하는거야? 진짜 웃긴다."

 "100번 찍어서 그나마 한 장 건진 게 이거겠지."

 "0.1초의 기적이네."

셀카에는 강렬한 자기와 인정욕구가 일렁이고 있으므로, 이를 SNS에 올리면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반응하기 쉽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알 만한 일인데도 인정욕구가 판단력을 마비시켜버리는 것이지요. 




사실 이 문구에도 인정욕구가 자리하는데, 그럼 이제까지 나의 게시글과 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네, 하고 낯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그 새벽에 충동적으로 앱을 삭제하게 되었다. 가끔씩 이런 내 충동에 감사함을 느낀다. 







귀갓길에 집 근처 중학생들이 하교하는 모습을 봤고, 체육복을 입고 앳된 얼굴을 하며 대화하는 그들은 마지막 인사를 

"디엠 할게."

라고 했다. 이들도 내가 보는 광고를 보고, 내가 보는 여성의 반라 혹은 전라를 볼까, 

아니면 엉덩이를 흔들며 추는 자극적인 릴스를 보느라고 손가락과 도파민이 이끄는 시간을 보낼까. 


이 뿐만 아니라, 학원가 상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다들 내 가슴 정도밖에 오지 않는 쪼만한 키의 여자아이들이 죄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 앱을 켜고 릴스를 함께 본다. 

내가 미친걸까, 세상이 미친걸까. 







이 책의 마지막에서는 사실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생각보다 뾰족한 수를 내놓아주지는 않는다. 다소 평범하지만 너무나 맞는 말들, 그러니까 인정 욕구에 얽매이지 말고 나 자신을 조금 솔직하게 남들에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맞는 말이다. 그 누구를 만나던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행동하고 말했다. 때로는 그 사람이 좋아할 것 같은 선물을 중저가에서 고가까지 투척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진짜 나를 잃어버리고 그 사람의 좋은 평가, 좋은 표정, 말 한마디, 메시지 한마디에 일렁일렁 너무 큰 동요를 겪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 사람과 평생 갈 것 같지만 생각보다 사람과의 관계는 쉽게 퇴색되고 금방 힘을 잃었다. 



다독여주었던 다른 구절을 몇개 더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온 사람은 다양한 반응을 경험하고, 자신을 적당히 드러내는 동시에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앞으로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할지 조정하는 마인트 컨트롤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친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상대방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크게 상처 받고, 타인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반응이 두렵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어울리는 정도가 달라 어차피 모든 사람과 마음을 나눌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세요. 


상대의 반응에 나노마디마다 모든 솜털이 곤두서있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대의 진짜 마음과 생각은 알기 어려워진다. 온라인상에 올라오는 그 사람의 일상, 그리고 나의 일상은 0.1초만에 찍힌 정제된 순간으로 상대를 읽고 나도 그렇게 읽힌다면 진실된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 그것에 대한 경종을 나 자신에게 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상대방 그 자체를 보기

필요 이상으로 남을 의식하는 사람과 있다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만 정작 상대방 자체는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이성을 바라보는 경우 입니다.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한테 호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없네. 내 인상이 나쁘지는 않겠지?"


이처럼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신경 쓰는 것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기운 없어 하거나 우울해해도 걱정하기는커녕 평소와 달라진 점을 눈치채지도 못하지요. 상사를 볼 때도 자신이 상대방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만 생각합니다. 


이제 아셨겠지요? 자신은 상대방을 신경 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정작 신경 쓰는 것은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 뿐이며, 상대방은 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애에 갇힌 시선을 타인에게 열지 않는 이상 상대방과 가까워지는 것도, 신뢰 관계를 쌓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인정욕구를 채우고 싶다면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에만 집중하지 말고 상대방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요? 


이 구절을 보고 정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내 행동과 말투 그리고 표정까지 모두 각본에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만들었으나 정작 그 사람의 진짜 마음, 그러니까 호불호나 그 사람의 생각에는 관심을 둘 여유도 능력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하트를 받고 싶은 걸까, 책에서 명확히 누구인지 제시해주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를 제외한 모든 인류가 인정욕구에 목메어 살고 있다는 것에서 한가지 위안을 얻었으며, 이제는 그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을 어느 정도로 포기하고 받아들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정욕구를 손쉽게 채울 수 있어 SNS로 물들어가는 내 휴대폰과 사진첩, 그리고 일상을 조금 더 내실있게 채우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내 풀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건전한 생각마저 들었다.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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