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요즘인지.
기상 시간 11시 13분. 올해도 고생했다.
척박하고 모노톤인 일상 속에도 분홍빛 솜사탕처럼, 입에 넣자마자 녹아내리는 무스 케이크처럼 마음이 사르르 풀어지는 순간은 있기 마련이다. 보통 예기치 못한 친절을 맞닥뜨렸을 때다. 방문한 매장의 점원이 밝게 응대를 했다든지, 앞서 가는 사람이 출입문을 살짝 잡아준다든지, 돌아오는 대답에 상냥함이 깃들여있다든지.
최근 본 근사한 친절은 이런 것이었다. 늦은 밤 마을버스를 타고 귀가할 일이 있었다. 경로대로 돌던 버스는 어느 한 정류장에 천천히 안착하며 클락션을 부드럽게 빵-하고 울렸는데, 자세히 보니 버스 정류장에서 졸고 있던 앳된 여학생이 그 소리를 듣고 의식과 버스를 겨우 붙잡은 듯했다. 겉보기엔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 때문에 본인의 주량도 모른 채 받아 마시다 취한 성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교통카드를 찍을 곳에 주민등록증이며 학생증이며 카드가 아닌 것만 쏙쏙 골라 찍는 것이 아닌가. 보통 마을버스 기사님 중에는 성마른 성격이신 분들이 많은데 이분은 달랐다. 조근조근 "그건 학생증이고~", "거기 카드를 꺼내서 찍어야지~"하고 말씀을 하시더니 스무스하게 목적지까지 운전을 하셨다. 늦은 밤 정적에 어울리는 과하지 않은, 조용한 친절이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자'라고 이야기하면 다들 '여유가 없어서' 쉬이 친절하기 어렵다 말한다. 그리고 친절이 가끔은 상대방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켜 의도하지 않았던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내가 베푼 만큼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 야속해 그까짓 거 왜 해야 하냐 반문하기도 한다. 요즘처럼 자기 것을 악착같이 취하는 게 영민하고 똑똑하다 인정받는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호구가 되고, 남까지 배려하는 사람이 멍청해진다. 하지만 저 버스기사님의 친절은 과연 그러한가. 내가 보기엔 아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진짜 호구는 '본인은 베푼 것도 없는데 남한테 받기만 바라고, 자기 것만 아득바득 챙기다가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챙겨서 살림살이가 나아진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자랑입니까.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길(아마 존 롤스의 정의론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가진 것들은 조상들이 열심히 일군 대가이고,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이 상호 협조하여 만들어낸 부산물이라 하였다. 결국 우리는 좋든 싫든, 알든 모르든 타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의지하며, 지지하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결과물은 모두가 공평하고 정의롭게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이고 그 근간엔 서로 감사하는 마음이 존재한다. 나는 이 이야기에 무척 공감한다. 오늘 내가 즐기고 누리는 모든 것은 다 누군가의 노력과 기여를 바탕으로 한다. 이 인정과 감사를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친절'일뿐이다. 누군가는 "그만큼 돈을 내잖아요"라고 하지만 돈은 대가를 받는 것에 대한 정당한 지불일뿐이다. 돈은 모든 행동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덧붙여 '돈을 냈으니 이만큼 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만행은 신자유주의에 근거'했다고 생각하는' 저열한 자기 합리화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짚어보는 나의 친절의 형태. 나는 올 한 해 누구에게 어떻게 친절했는가. 일단 새해맞이 겸 올 한 해 배송해 주신 데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새벽배송 기사님에게 감사 메시지와 간단한 간식을 전했다. 둘째, 헬스장 관장님께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반년 이상 운동을 할 수 있었다'며 감사 인사 겸 새해 인사를 전했다. 셋째, 길을 가다 어떤 할머님이 택시에서 내리시는 게 곤란해 보이길래 문을 잡아 드렸다.(요즘은 상대방이 도움을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먼저 물어보고 도움을 주는 것을 권한다) 넷째, 상담원 분이 통화 말미에 감기 조심하라고 하시길래 상담원분도 건강하시라고 한마디를 덧붙여보았다.(상담이 끝나고 '따뜻한 말씀 너무 감동했다'라고 메시지가 왔다. 얼마나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 이외 사소하게 남을 도왔던 일이나 주변 이들에게 마음을 전한 것들은 매번 하던 일이니 중략.
이렇게 된 김에 친절배틀을 해보면 어떤가 싶다. 요즘 내가 잘났니 내가 돈을 더 벌었니, 내가 더 잘 나가느니 하는 싸움은 많아도 내가 더 많이 배려했어, 내가 더 친절해하는 싸움은 본 적이 없다. 물론 누군가에게 자랑하려고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니겠다만, 서로 이런 내용을 공유하다 보면 다들 마음이 둥글둥글해지고 남을 먼저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행동들이 천냥 빚을 갚진 못하더라도 날 선 마음들은 분명 풀어줄 수 있을 테니. 부디 내년엔 다들 좀 더 웃는 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