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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Oct 16. 2024

무급휴직을 후회하지 않는다

노오란 아우라를 가득 뿜어내는 동그란 달을 따라 걷다 보면 형형색색의 체육복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야외 체조 교실이 나타난다. 달빛이 참 아름답네요, 하면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드라마에서 해준 말이 떠오른다. 달을 보면 여러 이야기가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주부들이 많은 댄스 교실? 이라 해야하나, 체조 교실은 저번에 동료를 따라갔다가 여러 동작과 분위기가 웃겨서 깔깔 거리며 따라 했는데 몸이 풀리고 좋았었다. 어둠이 내린 산책길을 따라 시간 맞춰 가니 오늘도 아줌마들이 잔뜩 모여 있다. 처음 들어보지만 신나는 뽕짝, 아이유 노래 등 다양한 음악에 맞춰 선생님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팔다리를 쫙쫙 피면서 쓰니 스트레칭도 되고 다음날이 되면 운동 효과로 몸이 찌뿌둥하다. 동작이 간단한 건 따라 하기 좋은데 처음 하니 따라가기 어렵다. 선생님 동작만 눈으로 계속 따라가는데 왼쪽 팔다리를 동시에 드는 나 자신을 보면 나 스스로 몸치구나를 느끼며 웃기다.


- 학교 안 가는 날은 뭘 할지 계획하는 것도 일이겠네요, 하고 휴직 전 옆자리에서 파트너를 이루어 일한 남자 과장이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부서엔 아내는 일하고 남자가 육아휴직하는 과장이 둘이다.


- 아, 수업 안 가는 날은 거의 발표 준비하고 과제하고 논문 읽느라 시간이 가요. 논문도 매주 8개 이상은 읽어야 하고 매주 발표가 있어서 힘들어요 발표 싫은데ㅠ그래도 5명 내외로 듣는 수업은 토론식이라 재밌어요. 다른 사람 생각도 듣고, 하고 내가 말했다.


- 저도 그런 거 좋아하는데. 과장님 덕에 대리 만족합니다! 전 요즘 가계부 써요. 휴직하니 아껴 쓰느라 빡셉니다.


선배인 그는 후배들한테 항상 돈도 잘 쓰고 다정하며 주위에서 본 사람 중 가장 가정적인 아빠이다. 나도 이렇게 육아를 열심히 하는 남편감을 찾아야 할텐데. 지자체 공무원들 등 업무 관계자들을 모아 제도 설명을 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똑똑하고 설명도 쉽고 재밌게 잘해서 우리 회사 직원이 이 정도 클라스다, 하는 자부심이 생긴다. 나도 우리 회사 이름이 밝혀진 수업에서는 발표를 할 때 왠지 우리 회사 사람으로서 허접해 보이지는 말자, 하는 마음이 든다.


오늘도 발표를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책을 보다가 한 다섯 시 반쯤 밥을 해 먹고 나오는 길이다. 최현석 셰프가 유튜브에서 알려준 방법을 참고해 알리오올리오를 두 번째 만들어 먹는데 맛있다. 엄마가 친구들끼리 단양에 놀러 갔다가 사 온 마늘 하나를 까서 러프하게 저민 뒤 터키에서 사온 올리브유에 셰프가 알려준 팁대로 마지막엔 버터를 썰어 넣는다. 바지락 대신 나는 예전에 이탈리아인 친구 지네브라가 해줬던 기억에 자주 이용하는, 참치 캔을 하나 다 넣는다. 흠 맛있어!


일곱 시, 일곱 시 반쯤 되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산책을 하는 게 루틴이 되었다. 지지난주에 갑자기 추워지더니 갑자기 또 날이 풀려서 하노이에서 사 온 반팔티에 핑크색 나이키 바람막이, 무릎까지 오는 아디다스 삼선 반바지를 입었다. 동료와 종종 같이 산책하던 길을 따라 댄스 교실에 혼자 가서 아줌마들과 야외에서 같이 춤을 춘다. 춤을 추며(정확하게는 몸을 삐그덕 대며) 여러 생각이 초 단위로 지나갔다. 그중 갑자기 한 선배를 따라 을지로로 출장을 갔는데 멕시칸 식당에서 밥을 사준 기억이 떠올랐다. 해맑았던 시기의 내가 떠올랐다.


요즘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재직하면서 다니지, 하며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30대 중반 한가운데에 무급휴직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선택 같은데 나는 선택에 고민이 없었다. 작년에 대학원 지원하려고 텝스 시험비를 낼 때부터 휴직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휴직을 하느라 연봉을 포기해야 하지만 돈 보다 중요한 가치는 쉼과 여유를 통해 얻는 에너지와 평안, 회복력이다. 그리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 책과 논문을 통해 새로운 연구와 논의를 알게 되는 것이 재미있다. 게으른 스타일이라(지능도, 성실함도 유전자라는 유튜브를 봤던 터라 유전자라는 핑계를 대본다) 엄청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리딩을 충분히 하고 수업에 가서 논의를 할 수 있고, 주말이나 저녁 수업과 달리 낮에 이루어지는 소규모 수업을 들을 수 있다. 대단위 수업에서는 어려운 교수 및 학우들과 충분한 깊은 논의를 할 수 있다. 배경이 정말 한 명 한 명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 건 정말 재밌고 엄청난 영감을 준다.


그리고 교수는 달리 교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교수님들을 보며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사회에선 만나기 힘든 네임드 교수들 수업도 듣고 대화와 농담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것도 좋다. 그야말로 저자 직강! 단순히 오랜 시간 지식을 축적해서 팩트에 대한 설명을 유창하게 해서가 아니라 한 마디 툭 던지는 그 인사이트의 가치가 엄청 크다. 그 한마디를 하기에 읽은 엄청난 책들과 경험, 깊은 생각을 한 시간들이 응축된 것. 챗 지피티가 창의적이고 논리적으로 칼럼을 써내는 시대가 되어 내가 곧 대체될 것 같애, 라고 말하는 교수에게 나는 그래도 교수님 정년퇴직하실 때까진 우리 사회는 교수님 이름으로 나간 글의 가치를 더 높게 볼 거예요! 라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을날, 가을밤에 운동을 하고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노곤하게 기대앉아 생각보다 단, 올여름 유달리 비싸고 귀했던 포도 한 송이를 씻어 먹는다.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짠남자 라는 티비를 보면서 회사에서 에너지지킴이었던 활동을 학교에서 하고 다니는 내가 떠오른다. 수업이 끝나면 누가 안 끌까 봐 에어컨이랑 불을 끄고 복도에는 에어컨 온도가 어떤지 체크한다. 회사에서 전기요금, 에너지 절약으로 각 부서에 에너지지킴이를 두었는데(주로 막내지 뭐) 요식행위가 아니라 진짜 열심히 활동했던 나.


삐그덕 대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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