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권은 오직 예비신랑과 예비신부 두 명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있지만 결혼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흘러갈지 장담할 수 없으며, 결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신랑과 신부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도 결혼식장에서 아내와 언약을 맺었다.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남편으로서 평생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겠다고 약속했다. 결혼은 생각보다 더 크고 중요한 행사였다. 내 평생을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나는 결혼이라는 퀘스트를 깨자마자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가정을 화목하게 유지해야 하는 다음 퀘스튼는 훨씬 더 난이도가 높을 거라는 것을.
난이도 높은 퀘스트는 절대 혼자서 깰 수 없다. 반드시 동료들을 모아 함께 던전에 입장해야 한다. 같은 길드에 속한 믿음직한 동료들이 하나로 뭉친다면 큰 피해 없이 끝판대장도 이길 수 있다. 누가 나의 동료가 될 수 있을까? 아빠? 아빠는 딱 봐도 내 동료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빠는 나에게 매달 돈을 요구하고, 심부름을 시키고, 사고를 쳐서 수습하게 만드는 빌런이었다. 엄마? 엄마는 결혼을 준비할 때부터 아들인 나에게 선을 그으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와 나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나의 동료는 단 한 명 아내뿐이었다. 아내는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주었고, 믿어주었다. 그리고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아주어서 나를 아빠로 만들어주었다. 나의 평생 기도제목이 화목한 가정이었고, 내 꿈 또한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 아내는 나의 꿈을 이루어준 귀한 사람이다. 나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 수 있게 첫단추를 꿰어준 내 아내를 은인으로 여겼다. 분명히 내 아내와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이며 선물이었다. 나는 좋으면서도 두렵고 떨렸다. 나는 가장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었고, 가족을 보살피며 이끌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귀한 선물을 열어보지도 않고, 방구석에 던져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으로서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를 매일 행하기로 결단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신혼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지혜를 구하는 방법은 기도와 독서다. 매일 새벽 또는 출근 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함으로 나는 하나님께 오늘 하루를 살아갈 지혜를 구한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세상에서 필요한 지식을 얻고, 마음의 근력을 키운다.
두번째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나 또한 가족을 위해 희생하기로 작정했다. 결혼하기 전에 이미 나는 아버지의 부양자가 되었고 내 월급의 30%를 이미 병원비로 지불하고 있었다. 아내는 아버지 병원비로 인해 가정경제가 휘청거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주었다. 한번은 아내가 돈 때문에 너무 힘들었는지 나에게 이메일을 쓴 적도 있었다. 아마 내가 책을 너무 많이 사서 더 힘들었나보다. 나는 아내에게 무척 미안했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과 헌금을 제외한 나머지 월급을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다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거나 인문서적을 읽었다. 오전 6시 30분 쯤부터 밀대를 들고 물을 뿌려가며 바닥을 빡빡 닦았다. 기어다니는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매일 청소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퇴근 후 저녁시간에는 아들들과 놀아주고, 목욕을 시키고, 재웠다. 아기가 잠든 뒤에야 비로소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는데, 그 짧은 시간은 우리 부부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소중한 오아시스였다.
항상 가정경제가 적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이너스통장을 뚫어야만 했다. 나는 매달 5만원 이하의 돈으로 생활하려 발버둥쳤으며, 그 돈마저도 점심값 5000원을 차곡차곡 모아 마련하였다. 돈이 부족할 때마다 내 마음은 예민해졌고, 가끔씩 나는 아내에게 내 감정을 쏟아내곤 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임신한 아내가 5000원짜리 자두를 먹고 싶다고 말했을 때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고야 말았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능력 없고 한심한 남편이었던 것 같다. 그 다음부터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점심값을 모으려고 노력했다. 한번은 점심값을 네 번 모아 따식이가 그토록 노래를 부르던 터닝메카드 무간을 사 준 적이 있다. 따식이는 너무나 기뻐했었다. 비록 하루만에 부러져버렸지만......
여기까지가 내 능력의 한계였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가정의 화목을 지속시키기에 내 능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집에는 가정불화의 씨앗이 심겨져 있었고, 어느새 떡잎이 올라온 게 보였다. 도대체 이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무엇이 원인일까? 예수님을 믿으면 가정이 구원받는다고 했는데......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문제로 인해 십수년동안 고통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참아내지 못하면 가정이 두 조각날까봐 두려웠다. 성경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내가 그토록 꿈꾸던 가정의 화목은 생각보다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마치 신기루처럼 눈 앞에 있는 것 같은데도 쉽게 잡을 수 없었다. 결혼한 지 12년이 지나서야 나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가정을 하나의 작은 국가라고 가정해보았다. 나는 그 나라에서 내가 가진 지위, 그 지위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그 결과 내가 간과한 부분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나는 그동안 내가 정말 어리석고 무책임한 가장이었음을 깨닫고 반성했다.
나라를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백성을 아우르는 왕의 권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왕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고권위자인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정해진다.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한 표는 한 사람의 권위와 마찬가지이다. 국민은 선거라는 행사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자신이 따르길 원하는 대통령 후보에게 모아준다. 가장 많은 권위를 가진 대통령후보는 100% 최고권위자인 대통령의 자리에 취임한다. 당선된 대통령을 추종하지 않는 국민들도 어쩔 수 없이 5년간은 그의 권위에 순종해야만 한다.
왕은 권위의 힘으로 그 나라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백성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왕과 친한 백성은 기득권자가 되고, 다른 백성들을 정죄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왕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백성은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이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백성의 지식, 시간, 노동, 돈, 건강 따위는 부차적인 것들로 치부된다.
나는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12년동안 권위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게 나라의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의 행복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희생하는 왕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내 생각이 옳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믿음 없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독하게 교만했고, 어리석었다. 나는 비둘기처럼 순결했지만, 뱀처럼 지혜롭지는 못했다. 나는 하나만 보고 둘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은혜만 보고, 공의는 보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사랑을 떠올릴 때 사랑은 무조건 참는 것이라고 편협하게 단정지었을 뿐이었다.
최근에서야 나는 비로소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참된 권위는 바로 그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사랑과 권위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한쪽으로 치우친 개념이었다. 그 단순무식한 권위의 손아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하게 내 목을 졸랐고, 나는 숨이 막혔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제서야 권위자의 부재는 곧 보호자의 부재임을 깨달았다. 우리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세 분 중에 한 분이라도 몸과 마음이 건강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