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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Sep 26. 2024

육아와 힐링데이트

  약국을 오픈한 후 나는 수요일에는 알바 약사님을 약국에 두고, 수요 예배를 드린 후에, 다시 약국으로 돌아가 자정까지 일했다. 시간이 흘러 근무시간이 10시까지로 줄었을 때부터는 알바 약사님께 마무리까지 맡기고 나는 7시 전에 퇴근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빠가 함께 하는 저녁을 좋아했고, 함께 하는 그 짧은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최근 경기가 나빠지고 알바 약사님이 그만두시면서 다시 수요일에도 내가 밤늦게까지 약국을 지키고 있는 날이 많아졌다. 물론 이유는 다 돈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약국 문을 열어 놓는 것이고, 알바 약사님을 쓰지 않고 내가 일하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여전히 매주 수요일마다 내가 집에 일찍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족에게 미안해 죄책감이 들고,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한탄한다.


  어제는 수요일이었다. 모처럼 온 가족이 아침식사를 하는 시간에 아내가 물었다. "오늘 일찍 들어올거야?" 나는 "아니,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아빠를 쳐다보는 게 느껴져서 약간 낯뜨거웠다. 출근한 뒤로 계속 아내의 그 질문이 내 귓가에서 뱅뱅 돌았다. 오전부터 계속 한가해서 오후에도 왠지 손님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저녁도 매출을 보장할 순 없지만 왠지 오후보다는 좀 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점심시간에 약국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둘 다 오늘 5교시까지라서 집에 2시 전후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아내도 내 생각에 흔쾌히 동의해주어서 오늘은 밤 대신 낮에 집에 들렀다.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몇 번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고, 아내가 만들어준 계란 후라이를 먹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신나게 보드게임을 했고, 나중에 여름이와 나는 종이컵을 쌓아놓고 고무줄 총으로 누가 종이컵을 많이 쓰러뜨리는지 대결했다. 그런데 따식이는 혼자서 갤럭시탭을 들고 방 구석으로 갔다. 녀석은 혼자 방구석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싶어했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따식이에게 한 마디했고, 사춘기에 접어든 따식이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내가 자식을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는구나. 감정노동해야 돼서 힘들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저녁에 조금 일찍 퇴근해서 얼른 씻고 아내에게 심야 데이트를 신청했다. "우리 바깥에 나가서 뭐 좀 먹을래?" 아내는 뜬금없는 데이트 신청에 깜짝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처음에 살짝 거절했다가 곧 마지못해 데이트 신청을 수락해주었다.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서민식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김셰프님께 요리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셰프님은 다 소중한 아이들이라고 말씀하시며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곧 몇 가지를 콕 찝어주셨다. 우리는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서민식당 팟타이 매콤한 맛'으로 최종 결정했다. 아내가 다른 메뉴를 더 시키려고 했지만, 김셰프님은 한 가지면 충분하다고 말씀해주었다. 나로서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참 고마웠다. 약국에서 저녁을 이미 먹고 왔던터라 많은 음식이 부담되었기 때문이다.


  추석이 지난 9월말인데도 아직 밤은 더웠다. 우리는 먼저 시원한 생맥주를 짠 하고 한 모금씩 들이켰다. 속이 시원해지니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식당 스피커에서는 김동률이 부른 '취중진담'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곡은 우리 부부가 둘 다 중3이었던 시절에 발매되었던 곡이었다. 아내는 잠시 감상에 빠지더니 숨겨져 있던 옛날 기억을 꺼냈다. 중3 시절 단짝 친구가 자신의 집 우편함에 '취중진담'의 가사를 적어 넣어두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내는 그 노래 가사를 보며 누군가 자신에게 쓴 편지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깜짝 놀랬었다고 고백했다. 그런 말을 하는 아내가 참 귀여웠다.


  나도 답례의 표시로 아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하나 꺼내주었다. 갑자기 이 얘기가 왜 나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육아로 힘들어하는 아내의 모습, 학창 시절의 노래가 함께 나의 기억 창고를 건드렸던 것 같다. 나는 처음에 노래를 좋아하던 친구 용이를 떠올렸다가 나중에는 같이 다니던 교회에까지 기억의 손길이 닿게 되었다. 바로 그 때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N군이 섬광처럼 번쩍 떠올랐다.


  N군은 나보다 한두살 많은 형이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먼저 대구 내당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나중에 그 형이 고등부에 들어온 것 같다. 고등부에서 함께 하는 일이년동안 N군과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거의 없다. 그는 항상 나와 거리를 두었다. 나도 그 형이 좀 무서워서 거리를 두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당시 잘 나갔던 N군과 달리 나는 그 당시 말도 잘 못 하고, 외모도 꾸미지 못하고, 무엇보다 가난한 찐따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대학생이 된 내가 엄마와 십수년만에 재회했을 때 나는 우연히 N군이 나의 사촌형임을 알게 되었다. 이모네 집에 갔는데 그 형이 그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이모는 내가 잘 지내는지 보기 위해 그 형을 일부러 내당교회에 보냈다고 말했다. 그 당시 다시 엄마를 만난 기쁨에 세상 모든 것이 새로워보이고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나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갔다. 나는 그저 엄마가 나를 얼마나 보고 싶고, 나의 모습이 얼마나 궁금했으면 그렇게까지 했겠나 싶었다.


  아내는 결혼 14년차인데도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며 웃었다. 나는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아내는 아무리 공감하려고 노력해봐도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나도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행복감에 젖어 그러려니 했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엄마가 아빠에게서 상처를 많이 받아서 트라우마 때문에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타인을 통해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결론내렸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솔직히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로서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아내도 그랬다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애가 모성애를 넘어선 거야.나는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이 말이 참 듣기 좋았다. 그녀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기애를 뛰어넘는 모성애라는 말이 아름다웠다. 아내가 그 모성애 때문에 이렇게 아이들의 투덜거림과 불순종에도 참고 희생하는구나 싶어 마음 한 구석이 울컥했다. 이제서야 아까 아내가 내가 한 말 "만약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다면, 아직도 철이 안 들었을지 몰라."라는 말이 이해되었다.


  아침에도 아이들이 엄마한테 투덜거리다가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학교로 가버렸다. 아내의 마음이 걱정되었다. 나는 아내의 기분전환을 위해 같이 나가지 않겠냐고 말했다. 내 출근길에 같이 나가서 걷는 것만으로도 왠지 조금 힐링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그녀에게 외출을 권했다.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약국까지 태워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라페스타로 와서 블루샥 샥라떼를 마셨다. 달콤한 크림과 시원한 커피가 어우러져 기분 좋게 정신이 들었다. 기운이 나기 시작하자 기분도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내의 기분이 완전히 나아지지 않자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짠했다. 아내는 매일 아이들을 돌보느라, 그리고 아이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받아주느라 고생이 많다. 육아는 정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노동이다.


  나에게 무슨 좋은 아이템이 있을까 살펴보다가 오늘 도서관에서 빌려온 요시모토 바나나의 <꿈에 대하여>란 책이 생각났다. 나는 아내에게 그 책을 읽어보라고 건넸다. 아내는 약국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아내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내가 견뎌내주어서 많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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