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택'이라고 받아들이고, 매일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어제 글을 쓰면서 옛날 교회 고등부 시절에 사촌형이 나 몰래 교회에서 나를 지켜보았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거슬렸다. 어릴 때는 그저 엄마 얼굴을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때로는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뻐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나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어보니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기엔 관련된 사람이 꽤 많고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고 처음이 그랬듯이 마무리도 깔끔하지가 않다.
처음에 사촌형이 어떻게 교회로 나오게 되었을까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촌형은 아무리 봐도 교회를 꾸준히 다닐 성격은 못 되는 것 같다. 외모와 말투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의 모습과 행동을 보면 신앙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아무리 봐도 구도자의 마음으로 교회에 첫 발을 디디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마도 엄마나 이모가 용돈을 주면서 설득해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정확한 건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당시 고딩이었던 사촌형이 먼저 교회로 가서 나를 보고 오겠다고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사례비를 받고 미션을 수행하러 사촌형이 교회로 나온 것이라고 가정할 때 발생하는 의문점이 또 있었다. 1990년대 대구의 남자 고등학생들은 의리가 대단했다. 특히 학교에서 잘 나가고 좀 논다고 하는 아이들일수록 친구들끼리 매일 뭉쳐다니고 서로를 위해 대신 싸워주기까지 했다. 아마 사촌형도 그런 고딩이었을텐데 왜 사촌형은 사촌동생인 내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을까? 나는 사실 이 점이 가장 이해되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 사촌동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수 있다. 어른들이 비밀 유지를 강조했다거나, 사촌동생인 내가 바보 같아서 부끄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고딩이라면 기회를 봐서 따로 나를 몰래 불러내어 따뜻한 말 한 마디 정도는 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나라면 정에 못 이겨 그랬을 것 같다.
그리고 엄마와 이모는 내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심지어 편지 한 통도 쓰지 않았을까? 궁금해진다. 나를 관찰하면서 내가 그들이 세운 합격 기준을 통과하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그들이 말한 것처럼 정말 나의 공부에 해가 될까 그랬던건지 알고 싶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엄마였다면 아들을 너무 보고 싶고, 알고 싶어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몰랐던 내 엄마의 얼굴을 사촌형은 알고 있었다. 사촌형은 심지어 엄마를 만나고 용돈까지 받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몰래 나를 교회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린다. 어떻게 20세기 남자 고딩이 그렇게까지 냉철하고 철두철미할 수 있었을까 싶다. 내가 입은 옷, 나의 말투와 행동, 나의 친구들 그리고 나의 가족들에 대해 엄마는 사촌형을 통해 보고받았을 것이다. 보고를 받고 내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엄마가 너무 무정해보인다.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나중에 이모 집에 놀러 가서 교회 선배 N군이 사실은 사촌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놀랐고,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 때 그 어느 누구도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그저 공부에 방해될 것 같아서 거리를 두었다고만 말했다. 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생일 케이크는 고3이 되던 해인 1999년 1월의 케이크였다. 교회 고등부 앞에서 생일선물로 문화상품권을 받는 나에게 용이가 촛불이 환하게 밝혀진 생일 케이크를 들고 앞으로 걸어오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누군가 나를 위해 내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주기 위해 그런 이벤트를 열어준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그날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생일 케이크가 내게는 감동을 넘어선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케이크도 이렇게 소중한데, 이 생일 케이크를 N군이 교회를 함께 다니던 1998년에 엄마의 편지와 함께 받았었다면 얼마나 더 행복했을까 싶다. 나는 그날의 편지와 케이크를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내 능력으로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최악의 해결책은 도피하고 방관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엄마에게도 아들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만약 찾았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세울 수 있는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금씩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면 아마 처음에는 상상도 못했던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고, 세울 수 있는 목표도 한계가 있다. 어른이 되어보니 나는 그 시절 엄마의 선택이 참 아쉽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항상 최고의 선택만 하고 최고의 열매만 맺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내가 하는 일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보다 긍정적으로 꿈꾸고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다. 나는 이제 마흔 중반이지만 충분히 남들보다 조금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다. 내 삶에는 정말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고, 내 삶 가운데 문제가 없었던 날이 없었다. 이 과정을 통해 현재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나의 선택이라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사부일체'로 유명한 배우 정운택은 예수님을 믿고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단지 한 가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인데, 자신의 모든 것이 변했다고 간증했다. 그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웃기는 배우보다 진실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더 가치있다고 판단했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했다. 정운택 선교사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주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나의 선택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내가 인생 가운데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고,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도피하고 방관하고 포기하기보다는 주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의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고 싶다. 그렇게 살 때 나는 좀 더 선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매일 걸어가고 달리는 사람도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날 수 있다. 전설적인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는 몇년 전 이유를 알 수 없는 난치병 '근육 긴장 이상증'에 걸렸다. 매일 달리기를 즐기고,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대상을 받던 이봉주는 갑자기 혼자서는 달릴 수도 없는 지경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는 죽을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죽을만큼 달리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재활을 생활화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디에 가든 재활에 힘썼고, 마침내 조금씩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봉주는 자신이 2시간 7분이라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의 노력 때문이듯 난치병 또한 매일 노력함으로 치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봉주를 보면서 나도 매일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정 연습량을 정하고 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라도 노력이 없으면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없다.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행위가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정지우 작가는 신작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을 통해 계획을 세우고 매일 믿음으로 하루하루 노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내게 조언해 주었다. 정지우 작가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계속 생각하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한 뒤에는 오늘의 행복을 추구하고 누리라고 강조했다. 나도 하루하루 문제를 잊고 살다보니 그 문제가 예전보다 더 작아보이거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문제가 해결되어 있음을 경험했다. 왜냐하면 하루하루 연습량을 채우려 노력하는 사이에 나의 역량이 성장하고, 내 인격이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이봉주는 마라톤 선수로 42.195km를 달릴 때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러너스하이'를 은퇴하고 자연인으로서 고작 10km를 달릴 때 러너스하이를 경험했다고 한다.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좋고, 발바닥이 붕 떠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나도 언젠가 내 삶 가운데서 그 '러너스하이'를 느껴보고 싶다. 열심히 달리고 달려서 내 목표인 42.195km를 성취한 후,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달려보고 싶다. 분명히 내게도 그날이 오리라 믿는다.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