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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재식 Jul 02. 2018

바꾸고, 덧붙이고, 고쳐 쓰기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글쓰기 안내서 4

종종 미리 짜놓은 것을 토대로 글을 쓰는 경우 내용을 채우면서 실제로 써나가다 보면 미리 짜놓은 것과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일은 심심찮게 발생한다. 주인공이 불법적인 작전도 많이 수행했던 특수 요원이고 은행에 빚을 많이 지고 있어서 은행을 싫어한다고 썼지만,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다 보니 이 주인공을 그래도 투철한 군인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게 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은행 강도질에 합류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미리 짜놓은 것에서 살짝 벗어나면 새로운 내용으로 풀어나갈 해결책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짜놓은 것에서 벗어났으니 글 앞뒤를 좀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가 있으니까. 미리 짜놓은 것을 어쩔 수 없이 살짝 포기하고, 중간에 떠올린 새로운 곳으로 나가보는 것이다.

짜놓은 것을 따라가다가 그것을 깰 수밖에 없는 한계가 보이면서 ‘이거 망했는데’ 싶은 순간이 오는데, 그걸 잘 극복할 방법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오히려 더 좋은 길로 갈 수 있다.



나는 《미스테리아》라는 잡지에 “펄프”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에서 발생했었던 실제 범죄 사건 중에 잘 알려지지 않고 특이한 것을 소개하는 글을 꾸준히 실어왔다. 2016년에 나온 제6호에서는 1959년 부산을 근거로 악명을 떨쳤던 여자들로만 구성된 해적단과 두목 ‘나니야’의 이야기를 다루기로 했다. 1950년대 말 부산에서 해적들의 수법은 어떤 것이었으며, 나니야라는 사람은 어느 정도 규모의 부하들을 이끌고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내용을 쓰기로 짜두었다.

우리나라에 해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비교적 덜 알려진 것인 데다가 그중에서도 ‘나니야’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두목과 여자 해적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더 특이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내용을 써나가다 보니 나니야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었다. 그냥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해적 두목이 있었고, 그 일당이 총 여섯 명이었으며, 검거될 때 어느 배를 공격해서 얼마치의 물건을 빼앗았다는 신문기사가 전부였다. 어떤 동기로 결성된 해적단이었는지 나니야는 어떤 사연을 가진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등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나니야’라는 이름이 어느 나라 말에서 따온 것인지, 본명을 변형한 것인지 별명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주변 정황을 짐작할 만한 단서를 이리저리 조사해봤지만 나니야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어서 원고 분량을 채울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짜둔 대로 써보겠다고 막상 써나가다 보니, 1950년대 말 부산 일대에서 소란을 일으키던 해적질 사건의 배경과 분위기를 다루는 도입부가 썩 재미있어 보였다. 지금은 ‘조도’로 이름이 바뀐, 한국해양대학교가 있는 섬이 당시에는 해적들이 자주 왕래하던 곳이었다는 점을 끌어 내서 글을 써보니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도 좋아 보였다. 그러고 나서 자료를 정리해보니, 당시 해적의 모습은 다양하기도 했고 해적질에 얽힌 일화도 특이한 것이 여럿 있었다. 특히 그렇게 해적이 들끓었던 이유를 따져보면 나름의 정치적, 역사적 배경도 분명했다.

나는 그래서 미리 짜두었던 틀을 뜯어고치기로 결정했다. ‘나니야’ 이야기가 아니라, 1950년대 말 부산 해적들의 전체적인 풍경을 그려내는 데에 초점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나니야 이야기는 대신 글 마지막 절정 부분에 온갖 해적 이야기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 짧게 다루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내용을 꾸려보니 분량도 충분할 뿐만 아니라 재미가 더 잘 살면서도 해적이 유행하던 시절의 사회상을 살펴보는 제법 깊이 있는 내용이 되었다. 나니야 이야기에 관해서는 정보가 부족한 점이 오히려 더 이상하고 수수께끼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이런 식으로 미리 짜놓은 이야기를 쓰다가 조금 바꾸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를 소설을 쓸 때는 더욱 자주 겪는다. 소설 속 세상을 미리 짜놓고 거기에 던져놓은 인물들의 운명도 미리 짜놓았지만 막상 쓰면서 그 인물이 말하고 움직이게 하다 보면 ‘이 인물은 그런 운명으로 안 빠질 것 같은데’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다.

글을 쓰는 도중에 등장인물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풀리다 보면 인물이 이야깃거리를 직접 몰고 가면서 더 어울리는 말, 행동, 이야기를 나에게 계속 보여주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인물의 운명을 짜놓았지만 소설 속 인물이 그 운명을 거부하고 자기 운명을 직접 만들어 보여준다.

2017년에 잡지 《과학동아》에 실을 소설을 보내달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청탁을 받고 “이상한 용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미리 이야기를 짰다. 고려 태조 왕건처럼 용의 자손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고, 옛날에 기우제를 지낼 때 용을 놀라게 하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자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주위에서 비가 내린다는 것으로 흘러간다.

나는 이 사람의 배경을 소개하는 대목을 쓰다가 이 사람이 언제 자기 출생의 비밀을 깨달았는지, 부모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해 채워 넣게 되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계획에 없었던 주인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제법 재미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지고 시원한 어머니와 걱정 많고 세심한 아버지라는 개성이 저절로 생겼고, 주인공 삶의 고비와 주변 풍경을 재미있게 꾸미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원래 짜두었던 계획을 바꿔서 주인공의 부모를 조연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 둘은 처음에 이야기를 짤 때만 해도 등장시킬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두 조연을 이용해서 고비가 생기고 장면 전환이 일어나도록 내용을 꾸몄다. 덕분에 주인공의 삶이 좀 더 두터워 보이게 되었다. 조연들 덕에 공상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생동감이 있고, 인물의 성장을 다루지만 즐겁고 우스운 느낌이 유지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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