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세상에 대한 수필
"그런 건 공식이 멋대로 말할 뿐이잖아."
해외의 한 게임 커뮤니티에 그 게임의 "공식 스토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한 사용자가 남긴 댓글이다. 이 댓글은 머지않아 뻔뻔하고 당당한, 그 황당한 어감이 주는 재미로 커뮤니티에서 일종의 밈(Meme) 같은 관용어로 자리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는 나는 저 말을 처음 듣고 '음, 맞는 말이네.'라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일은 어렵다. 체스에 빗대어 보자. 체스의 한 차례에는 평균적으로 35수 정도의 선택지가 있다. 또 통계적으로 평균 번갈아 40차례, 즉 대략 80차례를 전후로 한 국을 마무리한다. 그 속에 약 1,000경 개 정도의 유효한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고 하니 지금 나의 선택이 그 중 어느 세계선으로 이어질지 고민하여 한 번의 수를 결정하는 일은 어려운 게 당연하다.
글쓰기는 어떤가? 한글에는 자모로 조합 가능한 문자가 1만 1천 개나 있다. 그중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문자를 제외하더라도 그 가짓수는 3,000개나 된다. 똑같이 80자의 글을 쓴다고 하면 하나의 체스 게임에서 나올 수 있는 것 보다 가늠조차 안 될 만큼 많은 경우의 수가 생기는 것이다. 하물며 1만 자, 10만 자 글을 쓰는 일은 우주에 존재하는 먼지의 개수보다도 아득히 많은 가능한 미래와 과거의 있을 법한 이야기의 실타래를 한올 한올 땋아 옷감을 재단하고 또 그 조각 조각을 누더기처럼 이어 붙여 한 벌 옷붙이를 재봉하는 일이다. 그것이 여름옷일지 겨울옷일지, 안감은 어떻게 채우며 끝단은 어떻게 손질하며 매무새는 어떻게 다듬을지 신경 써야 할 요소는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작가가 한 편의 글을 쓰는 동안 그의 머리 속에는 수천 수만 수억 개의 다른 가능성이 스쳐 지나가고 어떤 것은 버려지고 또 어떤 것은 벼려지는 것이다. 어제 죽다 살아난 그 등장인물은 그날 작가가 먹은 점심 메뉴, 그 글을 쓰는 도중에 나왔던 재채기 한 번에도 유명을 달리할 수 있었다. 하나의 다 쓰인 글에는 미처 담기지 못한 수많은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 또한 뒤섞여 있을 것이고, 그 속에는 작가가 미처 발견치도 못한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이 또 뒤섞여 있을 것이다.
무시당해 빛 보지 못한 그 가능성 중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낫고 그런 우월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저 작가가 마음대로 자기 보기 좋은 이야기를 골라서 휘갈겨 놓은 물건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다면 그건 또 생각하기 나름으로, 거기 쓰인 그 글이 모든 가능성 중 부정 불가능하고 확고한 단 하나의 이데아라고 말할 근거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런 건 공식이, 작가가 멋대로 말할 뿐이다.
그러니 당신이 지금 보고 읽고 들은 어떤 것의 내용이 성에 차지 않거나 또 다른 방향의 내용이 좋다거나 하는 것은 전부 지극히 타당하다.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누군가가 내가 쓴 글을 읽고 거기서 나는 생각지 못한 어떤 가능성을 파헤쳐 내어 또 다른 이야기의 가지를 피워내는 것에 불쾌해할 작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설령 그것이 여섯 살 먹은 꼬마의 되다 만 문장이라 하더라도 내 글이 그의 머릿속에서 비로소 형체를 갖고 태어날 수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 짧은 글귀는 내겐 환희일 것이다.
그러니 어떤 글을 읽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 이건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기서는 이랬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등의 덧붙임을 표현하는 것에 너무 주저하지 말아라. 장담하건데 당신 머릿속의 그 상상을 꺼내놓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작가에게는 훨씬 더 큰 무례일 테니.
비슷한 얘기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요즈음 들어서 특히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는 데에 과도하게 조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알고 지내는 한 미국인 친구가 얼마 전 메신저로 물어본 일이 있었다. 자기는 도저히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별것도 아닌 남의 일에 열받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자기가 보기에 한국은 의견을 가지는 것이 죄가 되는 사회인 것 같다며 나에게 설명을 좀 해달라더라. 별로 해줄 말이 없었다. 우선 나는 사회학이니 우리나라의 어떤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니 하는 것에 대해 그리 깊게 연구해 본 경험도 없을뿐더러, 나 자신도 그런 세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일까? 어딘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과 관계가 역전되어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타인의 의견이 자신의 인격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이 타인의 의견을 형성하는 것임에도 뭇사람들은 방점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 찍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한가득 모이고 보니 이제 나의 의견은 없고 우리의 의견만 존재하는 것이다. 웃기지 않은가. 내가 없고 그 위에 형성된 우리의 의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혼 없고 텅 빈 물건일지 상상이 되는가. 한국 사람들이 쉽게 뜨거워지고 또 빠르게 식는다는 그 냄비근성의 원인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애초에 영혼도 실체도 없는 그 대중의 의견이라는 것은 어떤 악의적인 프로파간다 한두 줄 만으로도 쉽게 움직이고 또 홀연히 마음이 떠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을 보고 고깝지 않기는 힘들 것 같다. 나는 이 실체 없는 대중이라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나를 지우고 살아가는데, 저기 저 인간은 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법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꼭 내가 있고서야 성립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이 우리가 있을 수 있고 저 우리가 있을 수 있고, 그 우리들이 모여서 또 다른 우리를 형성할 수 있고 이런저런 우리들이 모두 같은 의견 같은 방향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임에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의견을 첨예하게 주장하고 부딪히는 것에 주저하지 말자. 처음에는 뾰족한 날붙이 같아 아파 보이는 그 대립도 몇 번이고 부딪히고 나서야 비로소 둥글어지고 성숙하게 완성되기 마련이니까.
내가 있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고서야 남의 이야기도 들을 준비가 되는 것이니까.